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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ther you’re just beginning to explore the Western United States or you’ve been living here since the day you were born, the Via Podcast will introduce you to new and unique adventures that will change your perspective. Hosts Mitti Hicks and Michelle Donati bring their travel expertise to interviews with some of the West’s most fascinating experts, residents, and adventurers. In each episode, you will discover deep conversations in the hopes of igniting a new interest—foraging anyone?—or planting the seeds of a new-to-you road trip. You might even learn something about a place you’ve explored dozens of times bef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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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마지막 순서는 교회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입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세계화도 포함됩니다. 이 때 한국교회가 세계교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한국교회는 자체 한국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답해야만 합니다. ‘동양’이라는 단어는 서양인들이 만들어 규정하고 설명한 것 즉 우리 밖의 사람이 규정한 것이며 우리는 그 틀 안에서 우리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거기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정체성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교회사 인식은 신학교에서 시작됩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 세계교회사를 배우지만 사실은 유럽교회사 특히 서유럽교회사에 편중되어 있고 아시아나 아프리카 교회사는 거의 배제되어 있습니다. 즉 그동안 유럽과 북미가 세계 역사를 구성해 왔으나 이제는 달라졌고 교회사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와 호주를 포함하는 역사가 되어야만 합니다. 선교의 역사로 볼 때 19세기 서양의 기독교는 세계 보편적 기독교가 되어 복음을 주고 받았으나 여전히 북미와 유럽 중심 기독교가 잔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북미와 유럽교회는 쇠퇴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교회는 도약하여 기독교의 중심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옮겨진 상황입니다. 지난 1963년 몬트리올 세계교회협의회는 세계교회사 연구가 북미와 유럽 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논의했고 1970년 신학자 피셔는 전세계 다양한 교회들이 우주적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1981년에는 스위스 바젤에서 국제학술대회가 열려 다양한 모습과 역사를 지닌 세계 교회들의 일치를 위해 논의했습니다. 아시아 교회의 경우 1960년대까지 유럽 중심 교회사 연구에 머물러 있었으나 60년대 중반 이후 인도와 스리랑카 교회가 본격적으로 정체성을 드러내는 역사를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70~80년대 들면서 인도교회가 자기 중심의 역사 관점 갖기에 노력하면서 아시아 교회 역사에 대한 자각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역사연구 제1세대 연구로는 1927년 작성되고 1929년 출간된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역사연구가 한국교회사연구의 효시가 되었으나 여전히 선교사들이 서구중심연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제2세대 연구는 우리 주체적 역사 인식에서 비롯되어 민족관점, 민중사관, 수용사관으로 표현되는 역사적 관점을 특징으로 하였으며 신앙적으로 구속사 관점에서 한국역사를 바라본 것입니다. 제3세대 연구는 장신대 임희국교수 등이 중심된 것으로 글로벌 시대에 지역사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즉 강자 독식의 역사인식에서 약자를 균형 있게 바라보는 시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근대 아시아지역은 정치적 독립 이후 갱신과 성숙이 과제를 떠안고 있었고 아프리카지역은 미완의 경제적 독립으로 인한 숙제를 지고 있었으며 서양국가들은 문화적으로 패미니즘과 흑인인권운동에 맞닥드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영웅과 엘리트 중심의 역사를 반성하고 남성극복과 저변으로부터의 역사연구, 보통사람 중심의 역사연구 방법이 제시되었고 70~90년대 들어서며 인간중심의 역사에서 인간과 자연이 공존, 관계하는 역사로의 변화를 추구했습니다. 또한 20세기 후반 들어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활자문명이 영상문명으로 대체되어 역사기술방법이 다양화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승리자와 엘리트 중심, 남성중심, 기득권 중심, 서양중심, 거대담론 중심의 역사를 해체하고 다양성으로 대체하자는 주장이 일었습니다. 교회사도 범주와 관점이 변화하며 세계교회사에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 역사가 골고루 다루어져야 하고 한국교회 역사와 정체성도 서양교회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습니다. 사실 전래초기 한국기독교는 선교대상이 일반인과 여성이었고 기존사회질서의 파열을 가져왔으며 사대부가 변화하여 낮아짐을 실천하는 현상과 함께 발전해왔습니다. 그러므로 미시사를 비롯한 다양한 관점의 역사 인식은 한국교회역사 인식에 필수적이라 할 것입니다. 또한 전체와 함께 지역과 개체를 중심으로 역사를 보는 미시사적 연구방법과 함께 역사자료에 있어서도 기록자료에 의한 엘리트중심 역사인식으로부터 벗어나 구술에 의한 보통사람의 역사 자료를 확보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예는 임희국교수 등의 지역교회사 연구와 제주4.3사태 관련 역사기록, 한국교회 선교에 기여한 여전도사 역사 기술로 구현되었고 또 진행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한국교회역사는 선교사들의 역사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되며 그 자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관점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또한 교회내의 역사 자료를 중시해야 하고 역사의 시각을 지역으로 옮겨야만 할 때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와 세계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는 과거를 보는 일이고 현재를 거울로 비추어 보는 일이며 미래를 향해 열린 역사를 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변혁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역사는 다음 세대를 위한 바라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역사는 재미있는 스토리 텔링의 모습으로 유지되고 확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츠빙글리의 신학사상 츠빙글리는 한 마디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종교개혁과 사회변혁을 이루려고 힘썼던 개혁가였습니다. 스위스연방체가 양분되며 카펠전쟁을 치르다가 전사하였지만 그의 신학사상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장로교로 대표되는 개혁교회를 이루었고 사회적으로는 아르투어 리히를 통해 경제윤리로 구현되었습니다. 츠빙글리의 경제 윤리 아투어 리히는 취리히 대학에 봉직한 기독교경제윤리학자로 1930년대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회변혁이 필수’라고 주장한 레온하르트 라가르목사의 강연회에 참석한 것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대학에 진학하였고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유산을 발견하였으며 취리히대학에 머물며 경제윤리학자로 그리고 학문의 실천가로 살아갔습니다. 그는 츠빙글리의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정의’에 주목했는데 츠빙글리는 두 개의 법 또는 두 개의 의를 이야기 하면서 인간 정의의 기초와 목표는 하나님의 공의에 있으며 특히 산상수훈에서 그 실체를 찾아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는데 그 까닭은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죄의 용서가 필수적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이야기한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의 계명이고 속사람과 관련되어 있으며 인간의 정의는 겉에 드러나는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둘은 구분은 되지만 결코 나눌 수는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만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책속에만 머물 뿐 삶의 책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에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정의를 지킬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부단히 추구해야만 하는데 인간의 정의를 세우는 책임은 정부에,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일은 교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츠빙글리는 당시 경제현실 가운데 이자율과 관련해서 인간은 모든 재물의 청지기일 뿐이므로 이자를 받지 말아야 하지만 현실적 대안으로 5%의 이자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즉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삼아 그 말씀을 강단에서 선포하고 그에 따라 교회개혁과 사회변혁을 이루어야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츠빙글리의 신학사상을 아르투어 리히가 20세기 들어 재발견하였고 이를 기초로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정의가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경제 윤리를 모색하였습니다. 츠빙글리의 사회윤리에 기초한 아르투어 리히의 경제질서구상 1989년 유럽의 동구권이 몰락하여 시장경제질서에 종속되자 냉전질서는 종식되어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가 도래했고 정치.이데올로기는 경제중심시대로 이관되었습니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유산을 다시 발견한 리히는 시장경제질서만이 존속하는 시점에서 어떻게 정의로운 경제질서를 세울 것인가에 관심을 두어 츠빙글리 사상에 기초한 실천 가능한 경제윤리를 모색하고 추구했습니다. 당시 동구권은 서구와 같은 수준에 이르고자 하는 경제욕구가 상승하며 약육강식의 자본주의시장이 확대되었고, 서유럽은 이런 움직임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며 새로운 시장 확보에 주력하였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는 낙후된 경제현실 속에서 열강에 의한 착취가 강화될 것을 우려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시장경제질서란 개인의 자유와 이웃에 대한 책임을 기본으로 최선의 유용성을 추구하여 생산자와 소비자, 판매자와 구매자가 상호 만족에 이르도록 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간의 이기적 욕망에 작용이 작용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기도 했습니다. 이를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자기중심적 존재 즉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추구하는 죄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경제질서 속에 정의가 이루어지려면 아담 스미스의 말대로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야만 하는데 리히는 그러한 손이 작용하지 않으며 오히려 큰 손들이 작용하여 불공정과 불의가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도덕성을 갖춘 사람들이 경제 주체가 되어야 하고 공정한 규칙에 따라 경제 게임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리히는 실제로 작용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손을 대신해서 정부가 개입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분배의 문제와 관련해서 그는 자본 지분의 51%를 갖는 노동자 조합을 제안했고 환경문제와 관련해서는 자연이란 무한공급 가능한 소비재가 아니며 생산의 요소로 인정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경제 다윈의 법칙인 적자생존의 법칙이 작용하며 빈익빈 부익부 현상를 심화되었고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물결이 온통 세상을 덮으며 리히의 경제질서구상은 벽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 따른 개혁교회 전통과 기본정신은 새 시대에 새롭게 조명되어 다시 살아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취리히 개혁교회의 시작 스위스 취리히의 개혁은 교회의 개혁과 함께 사회변혁이 추진된 것이 중요한 특징입니다. 먼저 취리히 교회 개혁은 예배개혁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세교회의 미사를 말씀 중심의 예배로 바꾸고 예배 언어도 라틴어에서 토착어인 독일어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로스뮌스터 교회가 이끌어 온 라틴어학교를 정비해 선지학교를 세우고 이를 통해 성경 주석 작업과 함께 성경번역을 시작하여 1529년 신구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출판했습니다. 이때의 성경주석이 오늘까지 큰 가치를 가지고 전래되는 칼빈주석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츠빙글리의 교회 개혁은 폐지된 수도원을 사회복지 기관으로 바꾸어 행정당국이 관장하게 하면서 사회변혁을 동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가정법원제도를 신설해서 법률상담과 일상생활에 관한 상담을 했고 경우를 따져서 이혼과 재혼을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사회변혁의 큰 이슈는 농민들의 조세제도 개혁 요구였습니다. 취리히의 교회가 새롭게 바뀌고 사회도 변혁되는 과정에서 농민들은 이자율을 조정하고 소출세 납부를 거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라는 글을 통해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며 농민들의 요구를 거부했고 이를 수용하지 못한 농민들과 수렵인들은 1522년 반기를 들고 시당국에 항의하는 한편 츠빙글리를 비판하며 소요를 일으키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취리히를 떠나 재세례파를 결성하였습니다. 스위스 전역으로 확산된 종교개혁 바덴의 공개토론회와 스위스연방공동체의 분열 취리히의 종교개혁이 스위스연방공동체를 향해 번져나가게 되자 스위스 연방 지역대표자회의는 1522년 츠빙글리는 위험한 선동자로 지목하여 위험인물로 간주했습니다. 그리고 지역대표자회의는 1526년 바덴에서 공개토론회를 열었는데 이때 취리히는 대표를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이 토론회에서는 카톨릭교회 측에서 요하네스 에크 그리고 개혁교회 측에서 외콜람파디우스가 토론을 벌였고 그 결과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잘못된 것으로 기존 가톨릭교회 중심의 전통적 질서가 지켜져야 한다는 판정을 내렸습니다. 이에 따라 취리히는 고립상황에 처해 고사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바벨과 베른이 취리히의 개혁을 지지하면 나섰고 훗날 제네바의 개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베른의 종교개혁 베른의 군사적으로 강력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전통적인 귀족과 토호세력이 베른을 장악하고 있어 취리의 개혁 배경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베른이 개혁은 예술과 문화를 통한 개혁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성직자의 부패와 모순, 부패, 용병제 등을 해학적으로 풍자하며 비판하였고 민중으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1527년에 이르러 의회가 강력해지면서 전통 귀족 중심의 도시가 의회중심으로 바뀌었으며 1528년 1월 의회중심의 토론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토론회는 츠빙글리의 영향 하에 진행되어 교회관과 성경의 권위, 미사, 성자 숭배, 성화, 성직자 결혼 등을 다루어 미사의 폐지와 성화 철거를 결정했습니다. 이제부터 베른은 취리히의 뒤를 따라 교회개혁을 시작했고 이러한 결정은 스위스연방공동체이 세력 다툼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취리히는 연방공동체 전역으로 개혁운동을 확산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취리히와 베른 그리고 바젤은 개혁의 삼각형을 이루어 정치세력화 하였고 연방공동체는 기톨릭과 반가톨릭으로 양분되었습니다. 카펠전쟁 스위스 연방은 이제 취리히, 바젤, 베른 중심의 군사동맹체와 루체른 등 5개 도시 중심의 군사동맹체로 양분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529년 6월 1차 카펠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뜻밖에도 무기 대신 음식을 나누는 사태로 말미암아 전쟁은 계속될 수 없었고 제1차 카펠평화조약으로 마감되었습니다. 이 조약에 따라 개혁도시가 증가하자 가톨릭세력은 분노하여 루체른 등이 도시가 중심이 되어 반종교개혁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더구나 이들 지역이 개혁도시들에 의해 지리적으로 고립되자 제2차 키펠전쟁이 벌어졌고 여기서 가톨릭 세력이 승리하고 개혁의 주창자 츠빙글리가 사망하면서 스위스 전역으로 개혁운동을 추진하려던 그의 의지도 꺾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망 이후 취리히에 블링거가 취임함으로 츠빙글리의 개혁은 지속되었고 오늘날 츠빙글리의 후임자 블링거는 개혁교회의 교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취리히의 1차 공개신앙토론회 1529년 1월 29일에 열린 공개토론회에는 시 당국자와 일반시민, 가톨릭사제, 개혁가 등 6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이 토론회에 앞서 츠빙글리는 기존 설교를 축약하여 67개 조항으로 정리했습니다. 주제는 ‘권위’에 관한 것으로 중세교회의 전통적 권위를 부정하고 새로운 권위인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만을 주장했습니다. 드디어 토론회장에서 맞붙은 중세교회대표 파브리와 츠빙글리는 권위논쟁, 공의회논쟁을 펼쳤고 그 결과 츠빙글리가 승리하여 취리히에서 중세가톨릭 교회 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국가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일련의 변화가 따르게 되었는데 먼저 예배가 라틴어 대신 토착 언어인 독일어로 진행되었고 예배당에서 성상과 성화가 철거되었으며 성직자의 금혼이 깨어져 다수의 성직자가 결혼하였습니다. 1차 공개토론회 결과로 개혁의 물살이 급류를 타면서 수도자들이 수도원을 떠나게 되자 그 잔류재산과 업무의 처리가 취리히 종교개혁의 중요한 주재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잔류재산은 시당국에 귀속하기로 하고 환자와 나그네 돌봄 그리고 복지사업, 교육 등은 시 당국이 맡으며 교회는 신앙문제에 전담하기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 시민사회 성숙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에 따라 취리히의 개혁 작업은 완전히 자리를 잡아 취리히 사회는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취리히의 2차 공개신앙토론회 새롭게 개혁된 취리히에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개혁과정 중 교회의 성상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하고 이것이 점차 집단화된 것입니다. 그러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개토론회가 소집되었는데 1523년 10월 26일부터 사흘간 350여명의 성직자를 포함하여 전체 연방에서 일반시민 등 9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여기서 주된 의제는 성화와 미사였는데 한시적으로 성화를 허용하기로 하는 등 시의회는 중도적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두 번의 토론회를 통해 츠빙글리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으며 중세교회는 점차 소멸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즉 사순절 금식 전통은 차츰 소멸되었고 중세교회의 미사는 예배로 바뀌었으며 취리히 시는 완전히 종교개혁도시국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 동참하지 못한 세력인 농민들은 크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농노출신인 이들은 10%의 소작료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츠빙글리는 이를 5% 내외로 조정하자는 안을 제시했으니 농민들은 완벽한 자치권과 독립권 그리고 농지 소유를 요청하며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농노에서 동등한 관계로 신분변화를 제시했으나 농민들은 농노제도의 완벽한 폐지와 교회재산을 농민들에게 분배할 것을 요구하며 결국 독자노선을 택하여 재세례파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취리히 개혁 교회 1. 예배개혁 개혁된 교회는 미사를 설교와 성만찬 중심의 예배로 바꾸었습니다. 성만찬은 가급적 자주 시행할 것을 권했으나 1년에 네 차례 시행되었고 성찬기는 화려하지 않게 나무로 제작하였으며 교회 안의 성상을 철거하고 말씀 집중을 위해 악기 연주도 금지했습니다. 2. 새로운 체제 츠빙글리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교회체제를 구상했는데 이는 교회가 행정당국의 감독을 받되 경제적 독자성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교회가 토지를 소유하여 임대료와 소출로 목회자 사례를 지급하는 등 교회를 운영하도록 했습니다. 3. 새로운 목회자 양성기관 설립 츠빙글리는 교회의 라틴어학교를 정비하여 선지학교를 개교하여 중세교회 성직자들을 재교육하는 등 개혁 교회의 목회자를 양성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새롭게 청빙된 히브리어교사 펠리칸과 츠빙글리가 성경교육 특히 원어로 성경 읽기를 중심으로 교육했는데 히브리어 주석과 라틴어 해석 그리고 토착어 설교로 이어지는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형식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과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원어 성경이 토착어 성경으로 번역되어 1532년 완전한 독일어 신구약 성경이 완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설교의 원류를 츠빙글리의 선지자학교에서 찾기도 합니다.…
츠빙글리 신학사상의 변화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주임목회자로 청빙 받은 츠빙글리는 본격적인 개혁에 나설 즈음 당시로는 불치병으로 알려진 흑사병에 걸렸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츠빙글리는 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발병 후 모든 것을 체념하고 음악을 짓는데 몰두하던 그는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그 때까지 지니고 있던 에라스무스적, 인문적 개혁 의지를 버리고 성경에 몰입하여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개혁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연구와 아우구스티누스 연구를 통해 복음의 능력과 내용을 깨우친 후 오직 예수의 화해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음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며 본격적인 종교개혁에 나섰습니다. 1551년 츠빙글리는 뮌스터교회를 이끌어 가는 24명의 수사회원 중 한 사람이 되어 목회자와 감독관을 겸직하게 되었고 자신의 교회개혁 의지와 구상이 지지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인 1522년에는 ´권위 문제‘에 부딪혀 기존 교회의 제도와 공의회, 교리,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인문주의자들과 갈라서게 됩니다. 이들의 노선과 달리 츠빙글리는 기존 교회의 권위를 모두 부정하고 오직 성경 즉 하나님 말씀만을 새로운 권위로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회와 사회 개혁에 나선 것입니다. 이 때 츠빙글리는 성경주석을 통해 설교로 이어지는 과정을 가르치는 선지학교 즉 목회자 양성학교인 프로페찰을 신설하였고 철저히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개혁에도 나섰습니다. 당시 취리히 상황 그로스뮌스터 교회에 행해진 츠빙글리의 강해설교에 영향을 받은 청중들은 기성 가톨릭교회에 대한 공개적 비판을 시작했습니다. 즉 마리아 상과 그에 대한 숭배, 성자숭배, 수도원 부패, 성직자의 독신제도 등을 공개 비판하였고 그 가운데 당시 가톨릭교회 영향으로 사회제도로 정착된 사순절 금식과 고기 취식 금지 등 경건운동의 율법화를 강하게 비판하며 그 규례를 깨뜨리려 했습니다. 즉 1522년 3월 열 두 명이 출판업자의 집에 모여 의도적으로 소시지를 먹었고 그 소문이 사방에 퍼져 여러 곳에서 소시지 사건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사순절 기간 중 고기취식을 죄로 여겨 이를 처벌할 성경적 근거는 없으나 기존의 전통을 존중해야 하며 다만 공공질서를 파괴하거나 여러 사람을 시험 들게 하는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즉 사순절 기간 중 고기를 먹는 것은 자유이나 공공의 질서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되어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제 금식규례는 교회를 떠나 사회적 쟁점이 되어 시의회 사안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시의회는 그로스뮌스터교회 상임위원회에 이 문제에 대한 진단을 의뢰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츠빙글리는 전통은 존중되어야 하며 갑작스럽게 폐지되어서는 안 된다고 견해를 밝혔고 취리히의 성직자 대다수가 이에 찬성했습니다. 그러자 가톨릭교회의 콘스탄츠주교가 특사를 파견하여 협의한 결과 한시적이라는 단서를 달아 금식규례를 지키겠다고 결의했습니다. 츠빙글리의 개혁의지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중세교회의 권위가 새로운 권위인 성경 즉 하나님이 말씀과 충돌하는 사건이었으며 츠빙글리는 그의 설교를 통해서 중세교회의 전통인 교부보다는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야말로 참된 권위이며 따라서 마리아 숭배와 마리아의 중재사역, 경배대상 등에 반대하고 성인 숭배 또한 폐지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취리히 시의회도 이에 동조하고 따랐습니다. 또한 성직자의 독신 문제와 관련해서 자신이 1522년부터 결혼을 유지하여 네 자녀를 두었으며 이를 취리히의 사제들이 따르다가 교회로부터 파면되자 스위스 공동연방체에 자신을 의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츠빙글리의 성경이해 당초에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인문학적 이해와 기반 위에서 출발한 츠빙글리의 개혁은 이 무렵 에라스무스와 갈라서게 되면서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됩니다. 즉 1522년 에라스무스와 결별하면서 츠빙글리의 성경이해는 더욱 분명해졌는데 첫째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인간은 죄에서 자유 해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이에 응답할 수 있으며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성직자나 그 어떤 매개체로도 대신할 수 없고 셋째 인간의 사사로운 성경해석과 인문주의 적 성경해석에 반대하며 인간의 이성을 포기하고 성령의 역사를 간구함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금식 논쟁 사순절 금식논쟁과 관련해서 취리히 시는 양분되었고 시의회도 양분되었으며 이 문제는 스위스 연방 전체의 문제로 확산되었습니다. 연방은 취리히 시가 양분되는 것을 막고 어떻게 해서든 통합을 유지해야 하며 이를 위해 광장 민주주의식의 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1523년 1월 29일 취리히시 대의회가 성직자를 초청해서 공개토론회 열었는데 이 토론회는 시의회가 주관하여 토착 언어인 독일어로 진행되었고 일반대중 누구나 참석할 수 있었으며 성경에 근거해서 의견을 발표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기존의 교회주도의 성직자 중심토론회나 대학중심 토론회가 한정된 지식층만 참석해 라틴어로 진행되었던 것과 확연히 비교되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대단히 선구적인 직접 민주주의적 공개토론회였고 이 직접 민주주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시대의 자식, 시대의 리더 츠빙글리 당시 시대의 자식으로서 교육을 통해 두루 시대를 섭렵한 츠빙글리는 그것을 넘어서서 사회의 리더로 우뚝 서게 됩니다. 특히 고등교육을 통해 세계 시민으로 양성된 츠빙글리는 바젤에서의 교육을 통해 중세 고전을 습득하고 인쇄술을 바탕으로 한 인문학적 열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이때 츠빙글리는 나중 교회개혁운동의 동료가 될 펠리칸과 유드라는 친구를 사귀게 됩니다. 글라루스 시절의 츠빙글리 인문학 석사 학위를 받은 츠빙글리는 콘스탄츠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관례대로 고향마을에서 첫 설교를 하고 인근 글라루스에서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서너 개 교회를 돌보며 성실한 사제로서 특히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위스의 용병제도 츠빙글리가 목회하던 시절 스위스의 용병제도가 절정에 이르렀는데 벌써 수백 년 전통을 이어온 이 제도는 처음 젊은이들이 독자적으로 군대를 결성해 전쟁을 일삼고 문제가 생기면 나중에 정부가 이를 해결하거나 추인해 왔으나 14세기 이후 전사 계급으로 자리 잡았고 부르군도 전쟁에서 타국 제후 대신 싸워주며 그 군사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국제사회에서 수요가 증가하였습니다. 1494년 이탈리아가 유럽의 전장이 되자 프랑스가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고 이에 대항해 합스부르크 왕조도 참전했는데 전쟁 중에 프랑스로부터 급여를 받지 못한 용병들이 프랑스를 이탈해 상대진영에서 프랑스를 공격하고 다시 급여를 받은 일부 용병이 프랑스 진영에 복귀하면서 용병들끼리 전쟁을 치르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1503년 스위스연방공동체는 외국과 용병계약을 하려면 모든 연방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만장일치로 체결하였으나 지켜지지는 못했습니다. 츠빙글리의 용병에 대한 글 발표 1510년 츠빙글리는 스위스 외교정책과 용병정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글로써 밝힙니다. 여기서 그는 어느 편이든 용병이 되어 치르는 전쟁을 반대하며 굳이 용병이 되려면 교황의 편에 서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그는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이해를 가지고 용병은 교황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런 주장이 교황청의 신임을 얻어 그는 50굴덴이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금액의 포상을 매년 교황청으로부터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1513년 노바라 전투에 참여하고 1515년 글라루스 군사 500여 명이 참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글라루스에서는 프랑스 편을 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가면서 츠빙글리의 교황지지가 설득력을 잃었고 그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회의를 느껴 용병제도의 전적인 폐지를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전쟁의 참혹함을 보고 점차 평화에 대한 열망이 높아갔고 그로 인해 평화를 외치는 인문주의자들과 접촉하였고 특히 에라스무스에 주목하며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평화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아인쩨델른의 츠빙글리 1516년 교황지지자인 츠빙글리는 정치적 이유로 인찌델른으로 인사조처를 당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2년여간 전적으로 목회에 열중하며 성서연구와 신학연구에 치중하였습니다. 특히 중세 철학과 고대 교부들에 관해 연구하고 무엇보다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에라스무스의 주장에 동조해 원전으로 성경을 읽기 위해서 헬라어를 공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론에 치중하는 기독교가 아닌 실천적 기독교, 윤리적 기독교가 되어야 함을 인지하고 평화 사상을 지니게 되었으며 점차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성향과 개혁의 의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취리히 목회자 츠빙글리 1518년 후반에 취리히의 행정기관인 소의회는 용병 등으로 인한 도시의 퇴폐를 청산하기 위한 정신적 지도자겸 개혁가로 츠빙글리를 청빙했습니다. 이는 소의회가 츠빙글리의 개혁성향에 주목한 결과이자 스위스연방의 국제외교를 주도하던 취리히가 교황 편으로 기울면서 교황지지자로 알려진 츠빙글리에 주목한 때문으로 보입니다. 츠빙글리는 이 청빙을 받아들여 자신의 35번째 생일인 1519년 1월 1일 그로스민스터 교회의 주임목회자로 부임했습니다. 부임한 츠빙글리는 설교를 최우선과제로 여기고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신약성경 본문 강해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역사를 선포했습니다. 그는 설교를 통해 초대교회를 윤리적, 도덕적 모범으로 삼아 사회정화를 구현하고 윤리중심의 에라스무스식 교회갱신을 추구하는 한편 수도사와 성직자의 경제적 풍요, 비밀결혼, 성도 기만, 성인숭배. 수도사의 나태와 타락을 비판하며 교회갱신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또한 용병문제 등 사회 현실을 지적하고 비판하며 개인과 사회의 윤리적 개혁을 주창했습니다. 이렇게 교회와 사회전반에 대해개혁을 시작하던 츠빙글리는 당시 불치병으로 알려진 흑사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1. 종교개혁의 배경 스위스 앞서 살펴본 루터의 종교개혁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와 그 내부의 정치역학관계에서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웃나라인 스위스는 모든 면에서 이와는 매우 다른 환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일찍부터 스위스에는 왕이 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즉 중앙집권 정부가 존재한 경험이 전무했으며 지리적으로 알프스 산맥의 험준한 지형에 기대있어 골짜기마다 작은 부락을 형성하며 존재해왔습니다. 그러다가 1291년 호수가 많은 루체른 호수를 중심으로 한 다섯 마을이 계약연방체를 결성하면서 하나의 나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연방체에 각 지역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점차 발전되었으나 중앙집권체제로 가지는 않았고 공동의 이익과 안전을 도모할 뿐 각 지역 대표 두 명씩이 정기적 회합을 통해 만장일치로 모든 사안을 의결하는 등 각 지역의 자치권이 철저하게 보장되는 체제를 굳히게 됩니다. 스위스 종교개혁의 중심지 취리히는 이 계약 공동체에 공동체 결성 뒤 60년 후인 1351년에 가입했습니다. 당시 도시국가 취리히는 인근 짤츠부르그의 소금과 인근 지역에서 생산되는 채소를 교역하는 국제 상업, 무역 도시였습니다. 이 때 취리히는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귀족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정치와 행정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즉 취급품목별 동업조합인 길드 형태의 쭘프트를 결성한 상인, 수공업자, 금융가 등이 직종을 대표하는 162명으로 대의회를 구성해 입법권을 행사했으며 따로 동업조합 대표 25명으로 구성된 소의회가 행정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의회는 주로 경제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반면 행정을 맡은 소의회는 도덕과 윤리에 기반을 둔 건강한 사회 조성에 관심을 두어 두 기관은 종종 의견 충돌을 일으키는 등 늘 긴장관계에 놓여있었습니다. 반면 취리히 근교의 농촌마을 사람들은 행정 관료가 될 수 없이 소외되었으며 소의회의 청빙을 받아 추진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도 취리히 행정당국과 긴밀히 결속된 도시기반의 개혁이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농민중심의 개혁세력은 나중에 재세례파로 분립하게 됩니다. 당시 인구 약5천여 명으로 바젤이나 제네바의 인구 만여 명에 비해 절반 정도에 그쳤던 국제무역도시 취리히는 소금과 곡물, 가축, 견직물 등의 무역이 점차 쇠퇴하고 수공업이 침체되면서 16세기 들어 큰 경제적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도시에서 기반을 잃은 세력이 농촌지역에 진출하려했으나 기존 농민과 충돌하게 되고 국내에서는 더 이상 진출할 곳을 찾지 못하자 마침내 인근 국가들 간의 전쟁에 용병으로 참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간의 전쟁에 참여하여 수입을 올린 용병들이 귀국하면서 그 임금을 유흥비 등으로 탕진하는 등 윤리 도덕적 문제가 발생하자 행정을 맡은 소의회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도시를 구원할 정신적 지도자로 개혁자 츠빙글리를 청빙하게 된 것입니다. 2. 종교개혁자 츠빙글리 츠빙글리는 도시가 아닌 농촌 출신으로 그의 부친은 농촌의 작은 단위 지도자였습니다. 스위스의 농촌은 주로 밭농사와 초지에 기반을 둔 목축으로 이루어 졌는데 목축의 경우 험준한 산악지형과 혹독한 겨울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의 두레와 비슷한 형태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츠빙글리는 스위스 동부 알프스 지역에서 출생했으며 성직자인 삼촌을 따라 어릴 때부터 바젤로 가 라틴어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년 뒤 베른으로 가서 공부했으며 이때 좋은 음악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성악과 기악 모두에서 매우 뛰어났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당대 최고 대학중 하나인 비엔나대학에 4년간 유학했고 바젤로 돌아와 인문학 공부를 했습니다. 당시 바젤에는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었고 인문주의자들은 인쇄업을 하며 고전과 교부들의 작품을 출판했는데 츠빙글리는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서 츠빙글리는 인문학 학위를 취득하여 시대의 지식인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완결편 1522년 비텐베르크로 귀환한 루터는 4년 여간 개신교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즉 칼 슈타트와 결별하고 농민전쟁을 반대하는 등 점진적이며 온건함으로 표현되는 루터 자신의 개혁 노선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에라스무스와의 논쟁 1524년과 이듬해에 걸쳐 루터는 당대 대 인문학자이자 개혁지향자인 에라스무스와 논쟁을 벌입니다. 논쟁의 주제는 ‘사람’이었는데 에라스무스는 인간은 선하며 타고 난 선한 씨앗을 교육을 통해 발아시켜 고결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루터는 인간은 철저히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칭의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이므로 인간은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고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루터를 지지하던 인문주의자들이 루터와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루터 종교개혁의 위기상황 1525년에 이르렀을 때 95개조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은 동료 개혁가 또는 지지자들이 다수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지지 세력은 지식인과 농민 그리고 개혁의 동료 등이었으나 이들 안에서 분열과 갈등이 점차 자라가며 증폭되었습니다. 게다가 중세 가톨릭교회는 모든 개혁세력을 ‘루터파’로 규정하고 가톨릭 세력 자체 동맹을 통해 보름스칙령의 시행을 관철시키려 했습니다. 그야말로 안팎으로 위기에 처한 루터의 종교개혁은 자칫 사멸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위기의 극복과 루터교회의 탄생 이 때 헤센지역의 영주 필립이 루터를 지지하는 정치, 군사적 동맹을 주창하였고 루터의 활동 지역인 작센의 영주가 합세하는 등 1526년 토르가우 동맹을 결성되면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위기를 벗어나게 됩니다. 즉 가톨릭 세력인 황제의 힘에 대항하는 영주들의 동맹으로 개신교 탄생의 서막이 열리게 된 것인데 1526년 슈파이어 제국의회가 보름스 칙령을 보류하기로 결정하면서 개신교가 실체로 등장하였고 이것이 독일개신교 즉 루터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정치세력과의 관련 속에서 태어난 개신교는 루터를 지지하는 영주의 힘에 의해 실체화되었으므로 영주에 의해 교회 시스템이 가동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에 이르도록 세속 당국이 독일 루터교의 예배 순서까지 관리하고 감독하는 특징을 지닌 배경입니다. 즉 교회의 수장이 중세교회의 수장인 교황에서 지역 영주로 이동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당시 새로운 교회의 시스템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안이 제출되었는데 목회자 청빙과 대의적 의결 기구, 네트워킹 등을 특징으로 하는 1안과 중앙감독의 지시에 의해 교회가 작동되는 감독제의 2안이었는데 루터는 2안을 선택하여 오늘까지 루터교는 감독제를 시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1안의 모습은 오늘날 장로교회를 통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양 교회 체제의 확정 개신교인 루터교가 실체화된 1526년부터 30여 년간 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는 대립구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지역 영주들의 정치적 세력 다툼도 종교적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가톨릭세력은 1529년 슈파이어 제국의회를 열어 보름스 칙령의 시행을 추진했는데 이에 반발한 14개 도시의 대표와 귀족 400여명이 반기를 들고 항의서를 제출하여 루터를 지지합니다. 이 ‘항의서’에서 비롯된 이름이 오늘날까지 개신교를 일컫는 용어인 ‘프로테스탄트’입니다. 이 때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터키의 침공을 막아내었으며 교황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힘을 키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알5세는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를 소집하여 가톨릭 세력의 통합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루터교를 인정하려는 의도를 담아 신앙고백서 제출을 요구합니다. 이에 따라 루터가 아닌 멜란히톤이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는데 그는 가톨릭과의 조화를 위해 연옥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츠빙글리 등 여타 개혁세력과는 선을 긋는 내용으로 신앙고백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때 이후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루터교의 신앙고백서가 되었고 루터교는 이 신앙고백서 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서에 불만을 품은 군주들이 이탈하여 두 세력의 타협은 무산되었고 이탈한 군주들은 1531년 작센과 헤센 경계지역인 슈말칼덴에서 군사동맹을 맺었으며 이 동맹에는 점차 참여 세력이 늘어나 외국 세력까지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95개 조항을 적은 대자보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마침내 유럽 전체의 정치 구도를 변화시키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고 1546년 마침내 슈말칼덴 전쟁이 일어나 황제와 지역영주연합 그리고 가톨릭세력과 루터교 세력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해 종교개혁의 주창자 루터는 그의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555년 황제 카알5세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하여 1530년 작성된 멜란히톤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평화협정을 맺어 두 종교 지역을 분할하였는데 한 지역 한 종교 방식을 유지하되 지역 영주가 종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루터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뜻을 이어 실체화된 개신교인 루터교는 멜란히톤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위에서 새로운 교회로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비텐베르크 귀환편 루터 부재의 비텐베르크 상황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 숨어 지내던 10개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루터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논쟁과 개혁이 계속되어 점차 과격한 양상을 보였고 이에 따라 소요와 불안한 상황들이 이어졌습니다. 대표적 상황으로 먼저 루터를 추종하는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이탈했고 루터의 개혁 동료인 멜란히톤은 성만찬에서 회중에게 분잔을 시행했으며 독신 수사나 사제들이 독신서원을 깨버린 것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사제들의 독신 전통은 2~3세기 남녀결합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비롯되어 11세기 교회가 성직자의 독신을 강조했으며 1139년 라테란공의회에서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한 이후 강하게 유지된 전통이었습니다. 그리고 루터의 대학동료이자 종교개혁자인 칼 슈타트는 미사 철폐와 설교중심 예배로의 개혁, 전통적 성직자 복장 폐지,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 예배 진행, 고해성사와 사순절 금식의 폐지, 교회의 성화 철거 등 상당히 과격한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개혁론을 폈던 루터와는 차별되는 것으로 이로 인해 이들 둘은 나중에 결별하게 됩니다. 한편 당시 시장경제 형성단계에서 시 행정의 자율권을 가짐에 따라 비텐베르크 시 당국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자, 가난한 자의 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비어 있는 수도원과 교회 재산으로 공동금고를 조성하여 개혁 재원을 마련하는 등 매우 개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센의 선제후가 이러한 시 당국의 개혁에 반대함으로써 시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근 광산 도시인 츠비카우에는 한 예언자를 자처하는 자가 나타나 유아세례 폐지를 주장하는 등 사회적 불안 상황을 고조시키기도 했습니다. 루터의 귀환 1522년 3월 1일 루터는 잠행을 마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루터는 선제후의 보호를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보호만을 필요로 한다고 선언하며 사순절 강단에서 설교를 통해 개혁의 구상을 밝혔습니다. 루터는 이 구상에서 급진적 개혁 안에는 분노가 존재하여 끝내 폭력을 수반하게 되므로 개혁의 방법은 온건하게, 개혁의 속도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개혁이 본격화 되던 비텐베르크는 여러 상황과 노선이 혼재되어 매우 혼란스러운 가운데 루터는 이렇게 자신의 노선을 확고히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라틴어 예배로의 복귀와 성만찬에서 분잔 시행, 설교중심의 예배로 개혁, 회중이 예배순서 참여 등이었습니다. 점진적인 교회개혁을 주장한 루터는 비텐베르크 시 당국과 함께 국가와 사회개혁에도 나섰습니다. 이 때 루터는 먼저 결혼은 악마의 작용이 아니고 부부가 파트너로서 가족공동체를 구성해야 하고, 사회 약자와 빈자, 소외자를 돕기 위해 중세교회재산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금융경제가 시작된 시점에서 푸그 가문의 부의 독점과 고리채 등을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중심 교육제도 개선으로 교회에 얽매이지 않는 교육을 시행하고 국가와 교회의 분리 즉 정교분리로 두 개의 왕국설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왕국에 속한 교회와 하나님의 권세를 위탁받는 국가권력에 모두 순종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교회개혁과 마찬가지로 국가, 사회 개혁에 있어서도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때 개혁의 동료였던 칼 슈타트 등 과격한 개혁 세력들과 끝내 결별하였고 이 때 주도권 다툼에서 승리하여 칼 슈타트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축출되어 스위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루터와 대립된 노선을 걸었던 칼 슈타트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강조하며 신비주의적 성향을 띄었고 외형적이며 가시적인 것은 부정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서 끝내 루터와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개혁 세력으로 토마스 윈츠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칼 슈타트보다 더욱 과격하고 더욱 신비주의적인 사람으로 농민전쟁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매우 금욕적이었고 내면의 말씀에 집중했으며 주관적 확신에 의해 행동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는데 1524년 농민들과 접촉하여 바로 지금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주장하며 그 나라를 위해 칼을 들고 일어서자고 선동해 농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과격한 개혁에 루터는 반대의 뜻을 분명히 밝혔고 전쟁을 이끈 토마스 윈츠는 1525년 체포되어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1520년 루터의 중요한 저술활동 1.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보내는 글” 당시 중세교회의 피라미드 구조를 비판한 루터는 이러한 구조의 타파가 성직자에 의해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평신도인 황제와 귀족 등에게 이를 호소하는 글을 씁니다. 즉 독일의 지배세력인 귀족이나 영주 등이 공의회를 주도해야 하고 평신도의 독립성과 자주성이 보장되어야 하고 평신도 내부의 계급도 사회유지를 위한 기능적 역할만 할 뿐 근본적으로 타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의 다양성을 전제로 한 역할과 기능이 있을 뿐 계급이나 계층을 이루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것이 곧 만인제사장제이며 세속적 사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교황의 종교권력 폐지, 성직자의 결혼, 보헤미안에 대한 공정한 대우 및 평화공존, 빈민보호, 대학교육개혁 등을 주장했습니다. 2. “교회의 바벨론 유폐에 대하여” 당시의 교회 상황을 빗대어 표현한 제목의 책에서 루터는 교회의 7개 예전 중 2~3개만 인정했는데 성례 즉 세례와 성찬이었습니다. 여기서 ‘후스’가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그의 사상에 따라 평신도의 분잔 참여를 주장하고 화체설을 부인했으며 말씀에 대한 이해로서 “기록된 말씀”인 성경, “선포된 말씀”인 설교 그리고 “계시된 말씀”으로서 말씀 자신이신 예수그리스도로 말씀의 삼중적 형태를 주장했습니다. 3.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자유란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유럽 정신이 근간이고 유산이며 덕목입니다. 자유는 집단보다는 개인을 생각하며 결국 개인의 평등에 이르러야 하는데 이는 폭력이 아닌 사랑을 바탕으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신앙인은 믿음으로 자유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따라서 어떤 신앙인도 노예가 될 수 없으며 단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1519년 6월 독일의 카알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루터가 속한 작센 선제후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교황은 다시 루터에 대한 종교재판을 재개합니다. 그리고 루터의 95개 조항 가운데 41개 조항에 이단성이 있다는 결론에 따라 루터에게 파문장을 보냅니다. 그러나 1520년 12월 루터는 전달된 파문장을 대중 앞에서 불태워 버림으로써 교황청과 정면충돌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루터 문제를 황제에게 의뢰하고 황제는 1521년 3월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열어서 루터를 심문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루터는 ‘기왓장보다 많은 악마가 보름스를 장악한다고 해도 보름스로 가겠다.’는 말로 자신을 심정을 피력하며 제국의회에 출두했고 황제의 주장철회의사 질문에 사회에 대한 물의는 사과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느니 차라리 불에 들어가겠다고 답했습니다. 마침내 황제 카알5세는 최종판결 성명을 통해 루터는 이단이라고 규정했고 5월8일 루터를 제국에서 추방하며 루터의 글을 구독하거나 반포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의 보름스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1521년 판결은 확정되었으나 형을 집행할 공권력은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는 신성로마제국의 정정불안으로 황제가 이십여 년 스페인에 머물게 되었고 오스만터키와 전쟁을 수행하느라 보름스 칙령은 삼년간 집행이 연기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독일 남부지역과 스위스를 중심으로 루터의 지지자들과 종교개혁 세력이 확산되었고 한편으로 다양한 개혁 세력들이 우후죽순 발흥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즉 1521년 4월부터 10개월간 루터는 고독하고 힘겨운 잠행시기를 보냅니다. 이 때 독일남부 아이젠나흐의 바르트부르그성에 칩거하며 묵상과 수행에 몰입했는데 이때 지은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에 나오는 ‘성’은 바로 그가 머물던 바르트부르그성을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루터에게 있어서 이 시기는 주로 자신의 신학과 행위가 옳았는지를 성찰하는 시기였으며 헬라어 원전을 바탕으로 살아있는 대중적 독일어를 사용한 성경번역을 하며 위험한 시기에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루터의 종교재판 한국교회는 오는 2017년을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의 해로 삼아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는 루터가 면죄부 토론을 위한 95개 논제를 비텐베르그城 교회 문에 붙인 것을 종교개혁의 시발로 여긴 것입니다. 이 논제의 핵심은 “과연 교회와 사제가 죄의 사면을 위한 중재자가 될 수 있는가?”였습니다. 그러나 토론에 응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반향은 점차로 독일 전역에 확산되었습니다. 그러자 루터는 이듬해인 1518년 3월 95개 논제들을 요약해서 발표했는데 역시 그 내용은 면죄부는 면죄의 효과가 없고 단순히 건축헌금용이며 차라리 가까이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가톨릭 교회가 반발하기 시작했는데 면죄부 판매를 맡았던 ‘테젤’이 소속 수도원을 동원하여 루터를 이단재판에 넘기도록 선동했고 실제로 1518년 혐의입증을 위한 청문회를시작으로 재판과 파문결정 그리고 1521년 보름스 칙령으로 추방령이 내려지기까지 2~3년여간 루터는 아주 중요한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즉 이 기간에 루터는 중세교회와 스콜라 신학 그리고 자신의 신학 등에 대해 깊이 성찰하였고 결과로 자신의 입장을 더욱 확고히 다지게 되었습니다. 루터에 대한 종교재판은 루터가 속한 작센지역 영주인 선제후의 배려와 당시의 정치상황에 따라 바티칸이 아닌 독일 아우구스부르에서 열리게 되었고 교황청에서 파견된 당시 대신학자 카예탄추기경이 주관하였습니다. 그러나 재판정은 논쟁의 중심인 구원의 문제를 놓고 신학토론의 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루터는 떠나고 종교재판은 무산되었으며 신성로마제국 후임 황제 선출을 둘러싼 정치상황에 따라 협상과정이 진행되었고 밀티츠의 중재로 루터는 공개적 교회 비난과 대중 선동을 중단하고 교황청은 루터 문제를 독일교회에 일임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교회 신학자들이 계속해서 루터를 비난하고 나서면서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올라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1518년 하이텔베르그 논쟁으로 스콜라주의를 비판하며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내세우며 지지자들을 확보했던 루터는 1519년 독일 라이프찌히에서 당시 중세교회 대학자인 요하네스 에크와 다시 신학논쟁을 벌입니다. 여기서 루터는 보헤미아 후스의 입장이 옳았음을 천명하며 논쟁의 중점인 교회의 권위에 대하여 교황과 공의회를 모두 부정하고 새로운 권위로서 성경 즉 복음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중세교회를 따르는 보수주의자들과 루터의 입장을 지지하는 인문주의자 및 후스파로 양분되었습니다. 이 논쟁을 통해 루터는 더욱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하였고 그와 더불어 글쓰기에 집중하게 되는데 1519년 시편강해와 갈라디아서 주석을 편찬하고 1520년 교황권과 중세교회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비판하게 되었습니다. 즉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예수이시며 교황은 오류를 저지를 수 있고 이는 성경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인간의 ‘착한행실’에 대해서 인간은 죄인이므로 오직 하나님이 은총에 따라 예수를 통해 새사람이 되어야만 착한행실을 할 수 있으므로 인간의 착한행실인 일상의 선행과 금식기도나 성지순례 심지어 미사 등 종교행위 조차도 믿음에 뿌리를 두지 않고는 소용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일상생활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믿음으로 사는 것이며 그로 인해 예배의 일상화가 이루어지며 그것이야말로 참예배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2017년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교회는 마땅히 루터의 사상과 실천을 눈여겨 보고 한국교회 갱신과정을 새롭게 조명해 보아야 하며 이를 한국교회의 유산으로 만들어야만 합니다.…
루터의 사상 형성 과정, 비텐베르그 시절 루터의 비텐베르그 시절은 박사학위를 목표로 학문적 깊이를 추구하던 시기였습니다. 1512년 비텐베르그로 옮겨간 루터는 학문에 몰입하는 한편 교수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루터는 시편과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강해를 편찬하는 등 성경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세워나갔습니다. 당시 성경을 이해하는 오리게네스식 방법을 넘어서서 루터는 성경의 문자를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즉 자신에게 실존적으로 다가오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성경은 성령께서 ‘지금 내게 하시는 말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성경은 기록된 시대에 사람이 이해하는 언어로 하신 말씀이며 기록자가 처한 문화와 사회,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당시 언어로 하신 말씀으로 여겼습니다. 즉 비로소 복음의 눈으로 성경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중세로부터의 혁명적 변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하나님의 계시의 원천은 오직 성경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새롭게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가 되어야 하므로 설교는 철저히 성경을 바탕으로 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설교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이며 설교의 중심은 말씀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1505년 벼락사건으로 시작된 영적시련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1517년 종교개혁에 이를 수밖에 없는 대폭발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종교개혁의 폭발적 힘은 성경으로부터 나왔으며 그 말씀의 핵심은 로마서 1장 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무서운 하나님을 만족시켜 의에 이르고자 힘썼던 루터는 참회와 금욕, 고행에도 불구하고 자유함을 누리지 못했으며 끝내 율법적 의에 도달할 수 없는 좌절감에 하나님을 증오하기에 이르렀으나 바로 이 말씀에 따라 나 대신 예수께서 하신 일로 말미암아 그 결과 내게 미쳤으며 그로 인해 비로소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고 그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그것을 믿는 것으로 구원에 이르게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매우 큰 변혁이었고 특히 당시 교회의 성인신앙이 깨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의 발화점 면죄부 루터는 이렇게 재발견한 복음을 통해 종교개혁 신학을 세웠고 이 신학은 가톨릭교회와의 논쟁을 통해 성숙해 갔습니다. 그러한 루터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당시 기존교회의 면죄부 판매였습니다. 당시 면죄부는 이제까지 지은 죄에 대한 일시적 사면을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판매되었고 구원과는 무관했으며 교회의 제정 확충과 신도들의 죄에 대한 의식 고양을 위해 운용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성지순례나 십자군 참여 등 몸으로 그 대가를 치르던 것이 1303년에 이르러서는 성베드로 성당 입구에서 돈으로 판매되었습니다. 면죄부는 발행처인 교황청과 실제 집행자인 마인츠대주교 그리고 화폐를 생산하는 푸그 가문의 3자 역학관계에서 구조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신도의 영혼구원을 빙자, 악용하여 혹세무민하는 중세교회의 대표적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사제였던 루터는 거대한 구조악으로 판단했고 이에 대한 신학적 토론을 요청하는 95개 조항의 대자보를 내걸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토론되기를 기대했던 내용들은 진정한 회개, 연옥에 있는 영혼의 구원과 신자의 일시적 면죄, 면죄부 판매를 통한 교회 재산의 증식, 교인 설득의 폐해 등이었으나 실제로 토론은 일어나지 않았고 대신 이 내용이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최초 루터의 95개 조항은 이후 요약본으로 발표되었고 루터는 교회 건축헌금보다는 가난한 이웃이 더 중요하고 먼 곳의 교회보다는 가까운 이웃을 구제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면죄부 구입은 죄의 면제와는 상관이 없고 오히려 신자들이 죄를 쉽게 보는 신앙생활태도를 갖게 되는 폐해를 일으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면죄부 판매자인 ‘테젤’은 소속 수도원을 동원하여 루터를 이단으로 몰아가는 한편 교황청에 보고하여 처벌을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루터가 주창했다기보다는 루터가 하나님의 이끌림에 따라 이 일에 먼저 나섰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한마디로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모습인 사도적 교회로 돌아가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자는 운동이며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새롭게 나아가자는 운동입니다. 이는 루터만이 아니라 16세기 다양하게 일어났던 종교개혁운동이 공통된 정신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후년에 맞게 되는 루터의 종교개혁50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럽의 종교개혁이 한국교회의 원조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에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을 재고함으로써 세상의 신뢰를 잃고 고립되어 가는 우리 한국교회 안에 종교개혁의 정신과 원리가 각성되기를 기대하는 몸부림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루터의 초기 생애와 사상 형성 과정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북부 독일 아이스레베 출신입니다. 아버지는 광부였으나 나중에 광산물 제련소를 차려서 소자본가로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그는 9남매의 장남이었고 영민한 편이어서 부친의 기대가 컸던듯합니다. 어려서 라틴어 학교를 거쳐 성당 부설 기숙학교에서 공부했고 부친의 소망대로 법률가가 되기 위해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매우 엄한 양친의 영향을 받아 심리적 억압을 매우 심하게 겪었고 그로 인해 엄하고 두려운 하나님으로 규정된 신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루터는 법률 공부에 앞서 인문학적 소양을 위한 철학공부를 했는데 이때 오캄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유명론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대체로 평이한 대학생활을 했고 성악, 기악 등 음악과 시에도 깊은 소양과 관심을 가졌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후 법학공부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유명한 벼락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길에서 벼락을 만나면서 죽음의 공포를 극적으로 느낀 루터는 참회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 자리에서 수도사 서원을 했고 실제로 보름 후 엄격한 어거스틴파 은둔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벼락사건으로 시작된 루터의 영적시련은 엄격한 수도생활을 통해서도 해소되지 않았고 마침내 스승 슈타우피츠의 도움으로 사제서품을 받았고 이어서 신학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스승의 권유로 비텐베르그로 옮겨가 박사학위를 목표로 성경공부에 매진하는 한편 비텐베르그 대학 교수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비텐베르그 생활 5년여는 루터로 하여금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당시 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 95개조항의 대자보를 붙이게 만들었습니다.…
후스파와 지그문트 왕의 12년전쟁 체코의 벤젤왕이 사망하고 동생인 지그문제의 왕위 계승 시도에 후스파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양진영간이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이 때 후스파는 전쟁에 임하는 각오를 ‘프라하 신앙고백’으로 발표했는데 이는 후스의 개혁정신을 되살려낸 것으로써 하나님 말씀의 자유로운 선포, 차별없는 성찬, 성직자의 재산과 정치력 배제, 보헤미아 민족의식 획복 등이었습니다. 양 진영은 12년에 걸쳐 다섯 차례 전투를 치렀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하다가 협상에 들어갔으나 네가지 항목중 성찬에 관한 것에만 합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후스파는 ‘보헤미아 형제자매’의 이름으로 존속되었습니다. 후스를 정점으로 한 15세기 체코의 종교개혁은 무산된 것이 아니라 체코를 넘어 전 유럽으로 번져나갔으며 마침내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개혁을 하나의 교회 개혁의 관점을 떠나 한 시대의 거대한 사회변혁의 물결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15세기 중세 가톨릭 교회 이때 새 교황인 마틴5세는 문화 예술을 장려하여 바티칸 도서관 확장과 베드로 성당 건축에 나섰습니다. * 무너지는 중세사회질서 중세 후기가 되자 화폐경제가 도입되고 이에 따라 시장과 도시가 발전하면서 상인과 수공업자 계층이 새롭게 등장합니다. 금융업이 흥왕하고 다양한 지식이 창출되면서 수도원까지 도시로 진출하고 새로운 발명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특별히 인쇄술이 등장하면서 지식이 대량 확산되었고 이는 성경번역과 출판을 통한 종교개혁을 촉발했을 뿐 아니라 유럽 전체 변혁의 획기적 역할을 했습니다. * 인간이해의 변화 흑사병이 창궐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자 사람의 가치와 존엄에 대해 숙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단이 아닌 개인에 대해 인식이 증대되었고 개인주의가 싹터 교육에 눈을 떴고 대학이 설립되면서 교회가 독점하던 지식과 정보가 개별학교로 이관되었습니다. 그리고 질병과 관련하여 사람의 몸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지면서 해부학 등 의학이 발달했고 인체를 다룬 예술 또한 발전했습니다. 우주를 관찰하는 등 자연과학이 발달했고 화폐단위가 증가하면서 ‘백마’ 단위가 처음 등장하고 둥근 모습의 지구를 인식하여 신대륙발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 교회의 내적변화 당시 신학은 지나치게 이론적이고 사변적이었으나 점차 단순하게 실천지향적으로, 신앙교육과 경건훈련을 실천하는데 중점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인문주의자 등 새로운 지식인이 등장하여 교회와 성직자를 비판하고 중세교회에 얽매이지 않으며 교부들과 고대 고전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가 성경 등을 원전으로 읽고 주석함으로써 독일과 스위스 종교개혁의 바탕을 마련하였습니다. * 시장의 역할 새롭게 성장하는 시장은 종교개혁의 좋은 토양이 되었습니다. 기존 교회와 예배의 형식은 농부중심의 신자가 라틴어로 진행되는 미사에 참여해서 전적으로 수동적 태도를 유지했던 것에 비해 종교개혁자들은 시장에서 토착언어로 설교하고 토론함으로써 새로운 교회와 예배의 형식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체코의 종교개혁자 후스는 면죄부 판매 비판으로 그동안 지지를 받던 황제로부터 더 이상 지지를 받지 못하자 망명길에 나섰습니다. 남쪽으로 이동하며 이르는 마을마다 민중언어인 체코어로 설교함으로써 기존 예배와 차별화된 개혁성향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이런 활동을 통하여 후스는 세 가지 신학사상을 유산으로 남겼는데 10계명 해설과 주기도문 강해, 사도신경 강해가 그것으로 이후 매우 중요한 교육자료가 되었습니다. 후스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진리와 교회’였습니다. 특히 당시 중세교회가 교황을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구조였던데 반해서 후스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이를 중심으로 모인 무리로 이루어진 교회가 참교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어거스틴과 위클리프의 교회론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전통 중세교회와 후스가 주장하는 교회 사이에 중도적 입장이 있었는데 이것은 교황과 사회지배계층으로 대변되는 평신도의 협의체 즉 council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했으며 점차 대세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1414년 첫 공의회가 독일 콘스탄츠에서 열렸으며 이 공의회의 주된 쟁점인 후스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독일황제가 망명중인 후스를 소환하였습니다. 그러자 후스는 황제가 신변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자기 변호를 위해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나 체포, 감금되어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이단판결을 받고 사형이 선고되어 당일 화형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체코 전역이 들끓게 되었고 특히 젊은 귀족 450여명은 연명으로 편지를 교황에게 보내 체코의 종교문제는 자율적으로 해결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후스의 신학에 따라 날마다 성만찬을 행함으로써 중세교회를 부정하고 예배 참여자의 수평적 관계를 강조하는 새로운 교회를 유지해나갔습니다. 이 체코교회는 이후 후스 종교개혁의 상징이 된 분잔을 포함한 성만찬을 이어나갔고, 체코어로 예배하고 성경을 읽는 전통을 확립하였으며 마침내 체코 전역이 후스파가 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지역적으로는 도시에서는 프라하대학이 신학과 신앙적 근거를 마련하는 등 독자적 신앙의 길을 걸었으나 농촌지역에서는 과격한 행동에 의한 개혁이 진행되어 기성 교회에 대한 성직자 테러행위와 재산탈취 등이 자행되었고 점차 체코파는 폭력집단화 되었습니다. 그러자 상대진영인 가톨릭 또한 공격적 성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체코 전역이 후스파가 되었으나 여전히 가톨릭 편에 서 있던 벤젤왕은 교황청과 지그문트 황제의 압력에 밀려 후스파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419년에는 양 진영이 무력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2015년은 한국교회로서는 기독교공식선교 130년을 맞는 해이며 종교개혁사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종교개혁자 후스의 순교 6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이 때 ‘맛있는 교회사’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종교개혁의 정신과 역사를 살피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기철목사로 대표되는 저항의 순교와 손양원목사로 대표되는 사랑의 순교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교회가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서 본질을 잃고 위기에 직면한 이때에 교회 갱신을 위해 순교한 종교개혁자의 모습을 살피고 자성함으로써 백색순교신앙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 중세는 교황과 황제 사이의 권력 다툼이 내내 지속되던 시기였습니다. 십자군 원정의 실패와 로마제국의 몰락 등으로 세속권력이 교황권을 넘어서게 되자 마침내 교황권이 몰락하면서 교회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이 등장하게 되면서 점차 웅장한 건물과 피라미드 구조를 지닌 가시적 교회에서 벗어나 성도들이 공동체가 주를 이루는 비가시적 교회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이는 주권재민으로 정치권력을 설명한 마르실리우스의 주장을 교회에 적용한 것으로서 결국 교회란 평신도 중심의 공의회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이며 이에 따라 세속 군주와 귀족 등이 중심이 된 평신도 협의체 즉 공의회가 1414년에 열렸고 이후 교회 운영의 큰 방향이 되었습니다. 2. 체코 프라하의 종교개혁 체코 프라하의 종교개혁은 14세기부터 시작되었는데 1세대인 그람시와 2세대인 야노브 그리고 3세대인 후스로 계승되었습니다. 체코의 종교개혁은 엘리트와 대중이 연합한 개혁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1세대 종교개혁자 그람시의 종교개혁 그람시는 고위 공무원 출신으로서 성직자의 타락을 목도하고 사직하여 설교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고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주장했으며 교회갱신을 통해 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수립함으로써 예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고 설파했습니다. 그는 1372년 사회 하층민 300여명으로 교회 밖에 새로운 공동체인 새예루살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이 공동체는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당시 교회에서 금기시되던 성만찬 중 분잔을 시행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의식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매우 개혁적이며 파격적인 사건으로써 이에 따라 교황청이 그람시의 교황청 출두를 요구하자 그는 자신의 입장을 변론하기 위해 교황청으로 가는 길에 객사하고 말았습니다.…
초대교회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스데반의 순교 등 아픔을 통해 기독교가 확산되고 로마의 극심한 박해로 오히려 교회가 성장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을 통해 서북지역 중심의 기독교는 서울과 피난지 부산으로 확산되는 등 전국으로 그 지경을 넓혀나갔으며 애통의 현장에서 회복을 꿈꾸는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면서 기독교의 중심 또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피난지 부산에서 다양한 기독교가 좁은 지역에 집중되어 새로운 공존을 모색하고 새로운 정체성 확립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석진영의 찬송 ‘눈을 들어 하늘 보라’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전쟁 이후 한국사회는 여러 단계에 걸쳐 숱한 발전과 변화를 겪어 왔습니다. 그 일련의 과정을 간략히 표현하자면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다문화 사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현재 우리 사회를 간략히 다문화사회라고 규정할 수 있고 또한 이 시대 한국교회는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CCM ‘기대’는 주 안에서 하나 된 우리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찬송이라는 창을 통해 교회사를 바라보았는데, 교회사에 나타난 찬송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찬송은 신앙의 고백이고 삶의 이야기이며 성도의 교제이고 교회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정의는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며 세상이 종말까지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존재들임을 나타냅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찬송이자 ‘찬송으로 보는 교회사’의 결론적 찬송은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제강점기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시기로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이 정립된 시기였으며 이 시기 교회에 대한 박해는 교회의 성장을 가져온 한편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전반부 한국교회는 출애굽의 하나님, 민족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후반기 들어 교회에 대한 일제의 핍박이 심해지면서 고난 받은 예수에 대한 신앙으로 변화되어 내면화되었습니다. 한편 신비주의 운동이 일면서 이단이 발흥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 한국교회는 이미 평양대부흥운동과 장로교의 독노회, 총회 조직을 통해 전국적 체계를 갖춤으로써 민족운동을 내부에서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교회와 선교사의 분열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일제에 맞서 일부는 반일정서를 가지고, 일부는 교회와 선교의 유지를 위한 공존을 모색하며 선교를 계속했습니다. 그 가운데 함경도에서 선교한 로버트 그리어슨은 캐나다의 공식 파송 선교사로서 함경도 지역은 물론 멀리 유랑하는 조선인을 찾아 시베리아까지 찾아가 선교하는 폭넓은 선교를 37년간 계속했고 복음과 의료, 교육 모든 분야에서 반일 정서에 기반을 두어 선교하며 예수 사랑과 조선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이 시대 신앙인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찬송으로 남궁억의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한편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강요받아 끝내 총회차원의 신사참배 결의를 하게 됩니다. 이는 일제의 ‘국가의식’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엄연한 우상숭배로써 이후 한국교회에 크나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교단차원의 신사참배 결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난과 순교를 감당하며 신앙을 지킨 무리와 교회와 신앙의 유지를 위해 신사참배를 수용했던 무리 사이에 진정한 회개와 용서 그리고 화합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오늘날 한국교회의 극심한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한국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에게 치욕과 고난의 시기였으며 신사참배로 인한 배교와 일제 침략전쟁에 협조한 죄는 한국교회의 영적 회복을 위해 반드시 회개하고 청산해야 할 과제로 남겨져 있습니다. 이 시기를 보여줄 거의 유일한 찬송으로 우리에게 전영택의 ‘어서 돌아오오’가 찬송가에 남겨져 있습니다.…
구한말 한국교회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오직 예수를 구주로 삼고 살았습니다. 당시 선교가 시작되던 때 우리 나라는 국권을 잃어 임금이 강제 폐위되고 군대가 해산되는 상황이었으나 하늘나라의 임금인 예수가 선포되고 하늘 군대인 교회가 설립되는 영적 회생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기에 앞서 대부흥운동을 통해 기독교가 내용과 형식을 갖춤으로써 고난의 시기를 견디어 낼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헌신했던 선교사들 중 홀 선교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부 선교사 중 부인인 로제타 선교사는 남편과 딸을 선교지 조선에서 잃고도 당시 가장 고통 받던 서북지역 여성 어린이 그 중에서도 장애를 가진 여아를 위해 헌신한 특수 선교의 선구자였습니다. 기홀 병원을 지어 의료선교를 시작하였고 시각장애인 시설을 마련하여 봉사하였으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교육받는 통합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헌신한 로제타 홀은 남편과 딸, 손자, 아들, 며느리와 함께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여섯 식구는 생전에 한 번도 같이 모여 생활한 적 없이 오직 자신의 생명을 드려 헌신한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당시 서북지역에서 헌신한 스왈론 선교사의 찬송 ‘하늘가는 밝은 길이’를 통해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평양대부흥운동은 모진 고난의 시기를 견디도록 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1890년 평양에 도착한 의료선교사 하디는 선교비가 끊어지는 등 고난 가운데 사역했으니 실패하고 강원도로 이주하였으나 역시 그곳에서도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산의 성경공부모임에 참석하여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으며 하나님은 이러한 하디의 고난과 회개 그리고 기쁨과 소망을 우리 겨레 전체의 것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사경회를 위해 원근 각처에서 모여든 성도들에 의한 말씀운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열정 위에 하나님께서 회개의 은혜를 더하여 주셨고 그것이 기쁨으로 나타나 삶의 변화로 이어졌으며 날 연보를 비롯한 헌신에 이르러 마침내 대부흥운동이 되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부흥운동은 교회의 연합을 촉진하여 교단 신문과 잡지 그리고 찬송가의 일치를 가져왔고 나아가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을 증대시켜 엄혹한 일제 강점기 36년을 대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찬송 ‘예수 나를 위하여’를 통해서 예수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고난의 시기를 지나는 우리 신앙 선조들의 믿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경건주의운동에 영향을 받은 신앙인들은 말씀대로 믿고 그대로 살기 위해 헌신을 다짐하고 그 방편으로 선교에 뛰어 들어 미지의 세계로 향했습니다. 그 중에서 3개국 6개 교파의 선교사가 조선을 찾아왔는데 당시 ‘선교규정집’에 따르면 이들은 열정 및 헌신도가 높고, 성경 지식이 충만하며, 가르치는 능력이 탁월하고, 의료나 교육 등의 전문성을 갖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낯선 조선 땅에서 그분들은 언어와 관습 그리고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 중 말콤 펜윅과 윌리엄 멕켄지 선교사는 사랑하는 선교지 조선에서 생명이 다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선교했습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헌신은 찬송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을 통해 엿볼 수 있는데 이 찬송은 멕켄지 선교사의 파송 예배 때 드린 찬송이기도 합니다. 한편 부부 선교사인 윌리엄 베어드와 애니 베어드는 처음 부산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는데 남편이 순회 선교를 위해 몇 주 혹은 몇 달씩 집을 비우면 부인은 만삭의 몸으로 모든 어려움을 혼자 감당하였고 기쁨 가운데 출산한 딸을 병으로 잃는 아픔 가운데서도 찬송을 지어 찬양했습니다. 그 때 애니 베어드 선교사의 모습은 그가 지은 찬송 ‘멀리 멀리 갔더니’를 통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천여년 중세교회의 타락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종교개혁교회는 그러나 백여년도 되지 못해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이는 신앙고백이 지리한 교회교육으로 전락했고 설교 또한 지리한 교뢰 설교로 전락했기 때문인데 이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것이 경건주의운동입니다. 경건주의 운동은 복음서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사는 것이 신앙인의 책무라는 각성에서 출발했으며 독일에서 시작되어 영국과 미국에 영향을 끼쳤고 이는 세계복음화를 위한 선교운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특히 영국으로 전해진 경건주의운동은 웨슬리 형제에게로 이어졌고 이들은 신대륙선교 등 열정적 선교에 헌신했는데 동생 찰스 웨슬리는 찬송을 통한 영향력 있는 전도운동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편 최근 한국교회도 경건주의 운동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한국교회의 현주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이씃ㅂ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의 영적 성장은 교회의 위기 또는 어려움을 초래해왔는데 이는 교회의 정체성과 본질을 상실한데서 오는 결과였습니다. 한국교회 또한 양적성장의 결과 사회적 기대치에 이르지 못하고 사회의 냉소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대안세력을 자처하는 이단 발흥의 빌미를 제공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믿음과 행함의 불일치에 주목하여 경건주의 운동을 통해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건주의운동을 드러내는 찬송으로 찰스 웨슬레가 만든 찬송 ‘천부여 의지 없어서’가 대표적입니다. 성서에 기반을 둔 구체적 가사와 음악적 소양이나 학습 시간 없이도 따라 부를 수 있는 민요를 차용한 곡조가 특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경건주의 운동은 말씀을 믿을 뿐 아니라 말씀을 행함을 지향합니다. 따라서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면서 회개에 이르고 이는 개인의 헌신으로 나타나며 헌신의 방법으로 복음 전파에 나서는 선교가 선택된 것입니다. 이는 사나 죽으나 자신은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의 정착지인 것입니다. 이러한 헌신과 선교는 북미대륙을 거쳐 구한말 조선에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결과로 나타났는데 숱한 선교사들 가운데 일가족의 생명을 바친 선교 사례로서 홀선교사 일가족의 헌신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족과 친분을 갖고 있던 찬송가 작사자 크로스비 여사의 찬송 ‘주 예수 넓은 품에’를 통해서 헌신의 참된 신앙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이란 14~17세기에 서유럽에서 일어난 교회 개혁운동으로 보통 16세기 개혁운동을 말합니다. 1. 종교개혁과 결혼 종교개혁자들은 개혁과 함께 결혼을 했는데 이는 강력한 교황권의 바탕이 되는 독신 사제의 영적 우월성 그리고 중세교회 본질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사상가요 교사이며 예언자였을 뿐 아니라 회중찬송의 선구자였습니다. 그의 찬송 가운데 ‘내 주는 강한 성이요’(통일찬송가 384장, 21세기 찬송가 585장)는 가장 널리 불리는 찬송입니다. 2. 종교개혁과 신앙고백 종교개혁 시기에는 여러 가지 신앙고백이 등장하는데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 ‘제2 스위스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하나같이 성경이 무엇이며 얼마나 중요한지, 면죄부의 폐해, 교회가 아니라 성서의 권위 강조, 인간의 노력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음 등을 중심적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찬송가 ‘날 구속하신’(21세기 찬송가 548장)에는 그의 종교개혁 정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중세교회는 7세기 초 그레고리우스 교황으로부터 16세기까지 이어지는데 이 시기는 교황제도와 수도원 운동으로 대표됩니다. 1. 교황제도와 십자군 원정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신비주의적 삶은 강력한 교회의 영적인 힘으로 작용했고 막강한 교황권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멸망하여 다수의 왕국으로 분열되었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열되었으며 종교개혁으로 서방교회의 다수의 교파들로 나뉘었습니다. 또한 이슬람교의 시작으로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 간에 긴장이 고조되고 마침내 십자군 원정으로 그 갈등의 골이 깊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특히 십자군 원정 실패로 교황권이 약화되었고 흑사병의 창궐로 교회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 마침내 중세교회의 몰락을 가져오고 끝내 종교개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많은 찬송이 등장하게 되는데 주로 교회의 영광과 권위를 나타내는 찬송들이었으며 그 중 대표적으로 그레고리 교황에 의한 ‘하나님 아버지 어둔 밤이 지나’(통일찬송가68장, 21세기 찬송가59장)를 꼽을 수 있습니다. 2. 수도원 운동과 신비주의 수도원 운동은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한 개혁운동으로써 독신에 대한 영적 우위론을 바탕으로 수도사에게 독신을 요구하면서 점차 확산되어 막강한 교황권 확립의 바탕이 되엇습니다. 이때 버나드와 휴의 신비주의적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고 특히 버나드는 사랑을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을 주장하며 예수를 위해 보잘것 없는 자신마저도 사랑하는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이를 잘 나타내고 있는 찬송이 ‘오 거룩하신’(통일찬송가와 21세기찬송가145장)입니다.…
찬송은 신앙고백의 내용과 형식을 갖추고 있고,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포함하고 있으며, 교회의 역사를 바라보는 하나의 창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찬송을 통해 교회사를 보는 것은 효과적이면서도 합리적인 방법이 됩니다. 이제부터 시대 구분에 따라 찬송을 통해 교회사를 함께 바라봅니다. 초대교회의 신앙과 신학 초대교회는 주후 600여년 즉 그레고리 교황 이전까지로 보며, 다시 로마에 의한 박해의 시가인 전반300년과 기독교 공인 이후 중세까지 이어지는 후반 300년으로 구분합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주제어로는 순교와 금욕주의 그리고 이단을 꼽을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순교란 예수를 따르기 위한 필연적 과정과 결과입니다. 최초의 여성 순교자로 기록된 페르페투아를 비롯하여 많은 순교자들이 스스로를 산 제사로 드린 순교의 현장에서 마지막 찬송으로 글로리아 파트리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영광송의 첫 부분을 부르며 스스로를 산 제사로 드렸습니다. 우리 찬송가에 ‘성부 성자와 성령’(통일2,3장 21세기찬송가 3,4장)을 제목으로 실려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다른 특징은 신학의 정립입니다. 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시작된 후 스테반의 순교를 통해 기초를 세우고 로마의 박해 속에 성숙했으며 금욕주의 삶을 통해 더욱 성숙하게 되고 이단의 위기에 직면하자 이를 극복하고 교회의 하나됨을 추구하기 위해 교회가 무엇인지 세상에 선언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신학이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로 집약됩니다. 초대 교회이 찬송은 시리아, 헬라, 라틴어 세 가지 전통이 있으나 차차 라틴어가 예배 언어로 자리잡으면서 그 영향을 받게 되는데 대표적인 찬송은 밀라노 감독 암브로시우스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많은 찬송가를 지었으며 그로 인해 찬양이 서방교회 예배의 필수 요소로 자리잡았습니다. 그의 찬송가 중에서 ‘찬란한 주의 영광은’(통일찬송가42장, 21세기 찬송가130장)은 우리 찬송가에 실려 불려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와 이단 문제 - 이단과 신학·신앙의 확립 : 성경에서 이단은 예수의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 교회공동체를 분열하게 하는 사람들로 나타납니다. 이런 이단에 대해 ‘내가 믿는 것을 변증하는 것’이 바로 신학이 되었습니다. 즉 초대교회 때는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한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 비추어 봄으로써, 중세교회 때는 교회권위에 대한 도전이 곧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종교개혁 때는 개혁자들의 신앙고백과 기록에 따라 이단이 규정되었고 근현대교회에서는 오직 성경만을 중심으로 이단이 규정되고 있습니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이단은 교회를 바라보는 창이 되었고 이단의 도전은 늘 교회를 개혁하고 새롭게 하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 이단과 교회의 정체성 : 어째서 이단이 생겨나는가에 대한 답은 세상 마지막 때의 예언으로써 그리고 우리 신앙훈련의 도구로 주어진 것으로 할 수 있으며 결론적으로 마침내 교회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믿음을 굳게 해줍니다. 더욱이 이단은 사회적 혼란기와 교회의 부흥기에 발흥합니다. 더 직접적으로는 교회의 부흥기에 믿음과 삶이 같지 않고 교회가 사회의 비난을 초래할 때 이는 이단의 발흥을 위한 토양을 제공하는 것이 되며 교회의 책임을 결코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 이단문제는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창 : 이단이 창궐하는 이즈음 한국교회의 문제를 진단해 보면 양적 성장에 치중하고, 교파 중심적교회와 개교회와 대교회 중심주의가 만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단의 창궐은 한국교회는 균형 잡힌 성장 추구를 촉구하는 메시지로 여기고 연합활동에 힘씀으로 이단 대처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이단 문제가 닥칠 때 건강하게 문제를 노출시키고 공신력 있는 자료를 참고하여 신속하게 대처하며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여 대처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건강한 교회만이 이단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성찰과 노력을 계속해야 하겠습니다.…
한국 이단의 특징 분석 - 미국이단의 특징 (5Ps, prophet, promise, plan, possibility, place) : 북미 뿐 아니라 모든 이단을 분석하는 틀은 주로 이 다섯가지에 의존합니다. 즉 단체의 설립자 또는 지도자와 교리, 그리고 그 교리의 현실화 계획가 가능성 그리고 근거지의 마련 등입니다. 이 틀에 따라 분석한 결과 고학력, 전문직종 종사자가 이단에 미혹되는 경향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의 습관과 정보 그리고 사고와 감정을 통제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외국의 경우 이단에 대처하기 위해 이단에 대한 공신력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고 무엇보다 이단 피해자을 치유, 회복시키는 일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 한국이단의 특징 (한국적 적용) : 위에서 언급한 다섯가지 틀에 의해서 한국이단의 특성을 규정할 수 있으며 창교형, 혼합형, 개조형, 위조형 등 전북대 이광오교수의 유형분류는 더욱 한국적으로 적절히 적용 가능한 연구의 결과입니다. 또한 한국 근형대사의 질곡기에 한국의 종교, 문화, 인류학적 특성이 표출되면서 기독교가 부흥.성장하였고 이와 함께 이단이 발흥하였습니다. 한국 이단들은 하나같이 경제적 활동에 집중하는데 이는 정통성이 부족한 종교로서 수명을 연장, 유지하고 사회적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것으로 분석해볼 수 있습니다. - 적용사례 : 한국 땅의 이단을 유형별로 분류하면 통일교와 전도관 등 한국전쟁 즈음에 뿌리내린 국내 이단과 몰몬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등 외국계 이단 그리고 정명석 JMS, 장막성전,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등 2세대 이단 등으로 갈래 지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시한부 또는 조건부 종말론을 내세우고 있고 그 중에서도 신천지와 하나님의 교회 등이 가장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 북미 교파주의를 배경으로 한 이단들이 발흥 : 미국의 기독교는 서유럽 기독교가 전래되었는데 정부의 정교분리 원칙과 신앙의 자유 보장에 따라 다양한 교파주의 교회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그대로 우리나라에 이전되었습니다. 미국 기독교의 2차 각성운동 당시 미국교회는 교파주의에 몰두했고 이를 틈타 이단이 참된 교회를 주장하며 발흥하였고 정통교회의 압박에 따라 서부로 이전하여 터전을 잡게 되었습니다. - 한국 기독교이단 발흥에 끼친 북미 교파주의 선교와 이단 : 구한말 미국교파주의가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안식교를 비롯한 미국 이단 또한 우리나라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하에서 만주사변을 전후로 한국 기독교에 신비주의 활동의 경향이 표출되면서 비성경적 운동이 발흥하고 이때 이단은 급격히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북미 이단들은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구원파, 섹스교 등이었습니다. - 적용사례 몰몬교 : 몰몬교는 대표적 북미이단으로서 북미의 극심한 교파주의를 틈타 생겨나 서부에 정착, 성장한 이단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몰몬교는 보범적 윤리관으로 세인의 인정을 받고 있으나 예수의 또 다른 언약으로 몰몬경을 내세우는 등 신앙고백과 교리는 정통교회와 크게 어긋나 있어 몰몬교 뿐 아니라 모든 이단 판별에 주의해야만 합니다.…
기독교 이단을 대하는 바른 자세는 이단을 알고 대처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성경을 바로 알고 우리 신앙을 교회 안팎에 선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은 초대교회로부터 찾아볼 수 있는데 초대교회의 역사는 이단과의 투쟁사라 할 수 있으며 이단과의 투쟁을 통해서 신학을 공고히 하는 계기로 삼아왔습니다. 한국전쟁과 이단발흥 - 한국전쟁은 본격적인 이단발흥의 시기 : 한국교회사에서 한국전쟁은 서북지역 중심의 기독교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기회가 되었으며 이와 함께 교회가 전국적으로 부흥하였고 이와 함께 이단이 피난지 부산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발흥한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 한국전쟁 당시 이단들이 집중 발흥한 원인들에 대한 교회사적 고찰 : 기독교 이천년의 역사를 살펴볼 때 교회가 부흥할 때 교회의 분열 등 위기가 함께 있었고 이때마다 이단이 발흥하였습니다. 부산 피난지로 기독교의 중심이 남하할 때 서북지역에 자리 잡았던 이단들도 함께 남하하였고 마침 교회의 분열과 혼란스러운 피난지의 특성을 틈타 이단이 집중적으로 발흥하였습니다. 이러한 이단들은 하나같이 사회 혼란을 틈타 발흥하며, 한국인 교주가 왕이 되고, 한국 땅에 지상천국이 이루어지며, 한국적 교리를 선포하며, 대다수 한국인들이 구원받는다는 주장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피난지 부산은 다양성의 집합지로써 정통성이 주장되거나 이단에 대한 규정과 정리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이단의 발흥을 위한 토양이 제공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적용사례 통일교 : 위의 설명과 가장 잘 부합되는 것이 통일교입니다. 통일교주 문선명은 서북출신으로 부산에서 피난 시절을 보냈고 성지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부동산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사람을 신격화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국과 미국에서 정치를 이용해 급성장하였습니다.…
강원지역 교회사, 선교지 분할 협정의 체결과 파기 당초 감리교 선교지역이었던 강원지역에 장로교회가 선교를 시도하면서 총회차원에서 선교지 분할협정이 파기되자 강원지역에는 급격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즉 강원지역 선교를 놓고 감리교와 장로교가 경쟁관계에 돌입할 것입니다. 장로교의 지역교회와 노회는 강원지역 선교를 위해 선교목사 파송을 총회에 청원했고 이에 따라 총회가 검토 후 허락함에 따라 주로 서북지역출신 선교목사들이 철원, 장전, 강릉, 춘천 등지에서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다만 1942년 총회가 묵호에 전도목사로 파송한 김우일 목사만은 예외적으로 서북지역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1945년 광복을 맞으면서 국토가 분단되고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끝내 휴전선이 그어지게 되는 과정에서 장로교회는 1946년 강원지역 교회들을 경기노회에 편입시켰고, 이후 1946년에는 영동지역 교회들을 경북 경안노회에 소속시켰습니다. 한편 광복 후 서북지역에 공산정권이 서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한 장로교 출신 월남 피난민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까지 3.8선 근처에 정착하여 감리교회에 출석하였으나 이후 한국전쟁 이후에 월남민 중심의 장로교회를 세우는 경우가 많았고, 혹은 감리교회가 장로교회로 변모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장로교 총회는 1952년 총회에서 월남 목회자를 총대로 받아들이는 비상조치법을 통과시켰고, 강원지역 교회가 부흥하여 교회와 교인이 증가하자 기존의 두 시찰을 노회로 만들어 1953년 영동지역 교회들로 강동노회를. 영서지역 교회들로 강원노회를 창립하였습니다.…
2. 성육신 사건들 국민 계몽운동 1904년 김정식 등 연동교회 교인이 된 옛 독립협회 인사들은 담임목사 게일의 집에서 국민계몽을 위한 교육협회를 창설했습니다. 이는 러일전쟁 이후 개혁의 수단이 봉쇄되자 뒷날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교과서 편찬과 교사양성, 학교건축 등의 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또한 이와 함께 담임목사 게일이 회장인 기독교청년운동에 참여하여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는데 특히 구국차원의 체육운동을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신식학교 설립 한편 연동교회는 나중에 경신학교가 된 예수교중학교를 설립하여 식물학, 지리, 산술, 화학 등과 함께 조선역사, 한문 등을 가르치며 조선에 대한 자긍심과 자의식을 갖게 하였고 1904년부터는 물리, 수학, 화학, 천문학 교육을 통해 미신에서 벗어나 이성발달에 이르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연동교회 교인이 된 사대부들은 교사가 되어 한문과 우리 전통사상을 가르쳤습니다. 이 때 담임목사인 게일은 유몽천자를 저술하여 교재로 삼았는데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한국 근대교육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한글성경의 번역 연동교회 게일 담임목사는 선교사 가운데 유독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다른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의 한글번역에 힘썼습니다. 그는 한학자인 이원모, 이창직, 이교승 등과 함께 성경번역에 매진했습니다. 그 결과 한글 신구약 성경이 완간되기에 이릅니다. 이는 물질과 함께 정신의 근대화를 이룩한 쾌거이며 복음이 토착문화로 성육신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안동교회를 세운 선비들 안동교회의 별명은 양반교회입니다. 이는 연동교회가 천민거주지에 있던 것에 비해 안동교회는 양반들의 거주지인 북촌에 자리했기 때문이며 출석교인 대부분이 양반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안동교회는 연동교회에 출석하던 유성준 등이 북촌에 분립한 교회로서 선교사 없이 한국인 스스로 세우고 일구어 나갔으며 초대목사도 한국인 한석진 목사가 역임하는 등 주체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안동교회 박승봉 장로는 중앙의 고위공직자로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사건의 배후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실각하여 변방이 영변관찰사로 지내던 중 남강이승훈을 앞세워 기독교 신식학교인 오산학교를 세움으로써 망해가는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힘썼습니다. 이후 박승봉 장로가 중심이 되어 1909년 안동교회가 창립될 때 양반들이 많기는 했어도 전통유지 보다는 개역의 열기가 높았고, 사회 특권층만의 교회가 되지 않도록 열린 교회, 소통하는 교회를 지향하였습니다. 4. 북간도로 이주한 선비들 1899년 함경도 회령과 종성에 살던 학자 네 가문의 25세대, 142명이 북간도로 이주, 정착했습니다. 이들은 조상의 땅을 회복하고 새로운 땅에서 이상 사회를 건설하며 나라의 운명을 걸머질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이주했는데, 먼저 땅을 구입해 학교부지를 마련하고 서당식 교육을 시작했으며 이후 1904년 신식학교인 서전서숙을 세웠고 헤이그 사건으로 학교가 타격을 받아 폐교되자 1908년 명동서숙을 세웠습니다. 여기 정재면교사가 부임하며 기독교학교가 되었고 이로써 교회와 학교가 함께 있는 전통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유능한 교사를 유치하여 신식과목과 체육과목 기독교신앙과 민족의식 등을 고양하기에 힘썼습니다. 더 나아가 정재면교사는 간도에 70여개 학교를 건립하여 신식교육과 기독교복음전파, 근대화와 민족독립운동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선교 초창기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추진된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주 대상은 일반 대중과 여성, 서민 등 사회 하층민들이었습니다. 반면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사회 상층부는 서양 문명 특히 미국의 문명을 접하고 깨우치면서 이를 우리 국가와 사회에 적용하려 했습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스스로 기독교에 접근하고 주체적으로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정치 사회적 상황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에 이어 1997년 대한제국이 출범한 때였습니다.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며 새로운 국가체제를 구상하던 사월남 이상재를 비롯한 고위 관료 중심의 사대부들은 독립협회를 출범시키고 부정부패의 척결, 외세 배격, 입헌정치를 주장하였으나 모함에 의해 이듬해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어서 1902년 6월, 이상재, 김정식, 유성준, 이원긍 등 전 독립협회 회원들이 역모혐의로 의금부 감옥에 투옥된 개혁당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투옥된 2년여간 옥중에 도서실이 설치되고 여기 성서공회가 성서와 기독교서적을 제공하였으며 게일과 아펜젤러 선교사들의 옥중 방문이 이어지면서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즉 일신의 고초를 겪는 한편으로 인생의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즉 국가체제를 일으켜 세우는 수단인 이념, 사상으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복음의 진수를 발견함으로써 개인과 나라를 새롭게 하는 역사가 기독교를 통해 시작된 것입니다. 1. 연동교회 이들은 1904년 러일전쟁 후 무죄방면되자 선교사 게일이 시무하던 연동교회로 가 교인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사대부와 관리출신들이 주도하는 사회운동 즉 사회계몽, 교육을 통한 근대화, 여성교육 등 정신적 근대성이 교회 안으로부터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한 연동교회는 당시 천민계층이었던 ‘갓바치’들이 거주하던 지역에 있었고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충실하여 주로 하층민들로 구성된 교회였습니다. 여기 사대부들이 합류하면서 일부 교인들은 묘동교회와 안동교회를 분립하였고 이상재, 홍재기 등은 대승적 포옹의 정신으로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며 연동교회에 남아 신앙생활을 계속했습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에큐메니칼 운동은 WCC활동으로 대변됩니다. 따라서 세계에큐메니칼 운동사 두 번째 시간은 1948년 1차 총회부터 2013년 제10차 총회까지를 살펴봅니다. 1. 1948년 암스테르담 총회 주제, 질서의 하나님. 44개 국가, 146개 교단 및 교회 참여. WCC창립 결의. 동서 양진영간의 긴장 발생 2. 1954년 미국 에반스톤 총회 주제. 소망. 인종차별과 식민지 정책에 대한 논의 활발. 3. 1961년 인도 뉴델리 총회 주제.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빛. 회원의 급격한 증가. 국제 선교협의회 합병. 교회의 사회봉사에 대한 논의. 총회 후 바티칸 공의회 소집 예고 4. 1948년 스웨덴 웁살라 총회 주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변화). 인종차별에 대한 관심 재고. 분배에 대한 논의. 5 1975년 케냐 나이로비 총회 주제. 예수 그리스도 해방과 일치. 선교유예론의 등장, 신앙과 과학 문제 - 핵무기는 범죄, 가난에 대한 논의 6. 1983년 밴쿠버 총회 주제.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생명 핵무기 개발, 생산, 사용에 대한 논의. 정의 , 평화, 창조 질서에 대한 문제의 대두 7. 1991년 호주 캔버라 총회 주제. 오소서 성령이시여.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하소서 중국 참석, 동구권의 무너짐, 생태계와 환경오염 문제 대두. 8. 1998년 하라레 총회 주제. 하나님께 돌아가자 교회 분열에 대한 회개, 경제적 문제, 폭력에 대한 논의. 오순절 교회의 대두 9. 2006년 브라질 로프토 알레그레 총회 주제. 하나님 은총 가운데 세상이 변화되게 하소서. 제도권 교회의 쇠퇴,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 약화, 세계 교회 지도력 약화와 지역 중심축의 생성 10. 2013년 부산 총회 주제.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인도하소서! 제도권, 전통교회의 쇠퇴. 포럼 중심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대두. 사람과 사람 중심의 에큐메니칼 운동 변화. 생각은 글로벌하게 활동은 로컬에서 충실하게!…
세계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는 17세기로부터 시작되어 19세기에 이르러 활짝 꽃을 피웁니다. 그 후 20세기 까지 지속되다가 2차 세계대전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은 단절되었고 이후 WCC를 통해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 선교로부터 비롯된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 17세기까지 개신교는 유럽중심의 종교였으나 항해술의 발달과 영국의 종교탄압으로 그 중심이 신대륙으로 이전하게 됩니다. 이 때 유럽에서는 항로개발과 함께 인도를 비롯하여 세계선교를 시작하였고 18세기 선교기관이 설립되었으며 세계선교지원을 위한 신앙단체가 생겨났습니다. 이때 발생한 세계선교에 대한 열정은 신대륙으로 옮아갔고 이후 19세기 말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권 선교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는 선교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2. 연합으로 비롯된 에큐메니칼 운동 세계를 향한 뱃길이 열리면서 1846년 런던에서는 개신교연맹이 결성되고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회가 열렸으며 이를 바탕으로 세계 성공회와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이 연맹하여 국제적 연합기구를 구성했습니다. 이는 세계 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3. 교육으로 비롯된 에큐메니칼 운동 에큐메니칼 운동은 1889년 세계주일학교연맹 결성, 1855년 YMCA와 1894년 YWCA 창립, 1886년 세계대학생선교연맹의 창설로 더욱 구체화되었습니다. 4. 사회운동으로 표출된 에큐메니칼 운동 이는 1843년 영국 윌버포스에 의한 반노예운동단체 결성과 1964년 세계적십자회 조직, 1870년대 독일에서 시작된 도시빈민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봉사활동 등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즉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꽃피운 에큐메니칼 운동은 선교, 교단연합, 교육과 청년운동, 사회참여와 변혁운동을 주제로 하여 포괄적 신앙운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편 19세기말부터 20세기에 걸친 에큐메니칼 운동은 세 차례의 국제 모임 끝에 1910년 대회에서 ICM즉 국제선교협의회를 탄생시켰으며 이 대회는 세계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발점으로 여겨지고 습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서 세계교회는 평화운동을 전개하여 실천적 기독교 즉 평화를 위하나 교회의 실천을 강조하며 교회의 하나 됨을 추구했습니다. 그 결과로 국제기구인 ‘삶과 봉사’가 구성되었습니다. 5. 신학으로서의 에큐메니칼 운동 1927년 로잔에서는 국제기구인 신앙과 직제를 구성했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역사는 3세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방대한 지역에서 하나의 신앙고백을 추구하며 영지주의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사도신경을 확립하였고 이어서 신약성경의 정경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 신조로 확립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유산으로 전수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어지던 에큐메니칼 운동은 2차 대전 이후 단절되었다가 1948년 WCC 창설로 재건되었습니다. 에큐메니칼의 어원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단어 오이쿠메네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경제와 생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교회내적으로는 세계교회들의 교제와 나눔, 연합을 일컬으며, 어원적으로는 세계의 다양한 현실들 즉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성경과 기도를 통해 증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사회봉사활동으로 나타난 일제치하의 에큐메니칼 운동 다. 한국교회역사는 주일학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만큼 역사가 깊습니다. 감리교회로부터 시작된 주일학교는 세계주일학교연합회와 활발히 교류하고 교제를 직수입하여 사용하였으며 10개 교단과 모든 선교사들이 참여하는 조선주일학교연합회을 조직하는 등 연합과 일치운동을 매우 활발히 진행하였습니다. 6. 광복 후 에큐메니칼 운동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세계교회는 화해를 과제 삼아 WCC를 창설했고 한국교회는 여기 참여함으로써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던 세계교회와의 관계 복원의 전환점으로 삼았습니다. 7. 1950년대 중. 후반 NCCK의 활동 당시 NCCK회장 한경직목사는 초교파적 연합운동을 주도했고, 동아기독교협의회가 결성되자 아시아교회들의 연합과 일치를 강조하며 한국교회 참여에 앞장섰습니다. 8. 칼 메킨타이어의 WCC반대운동 근본주의자인 그는 한국교회 안에 근본주의 신학을 확장시켰고, 재정지원을 통해 교단분열을 조장했으며 WCC에 대한 용공론을 펴는 등 흑색선전을 펼쳤습니다. 9. 1960년대 두 부류의 연합활동 이때 한국교회는 두 가지의 연합활동을 펼쳤으나 서로의 활동은 분리된 채 진행되었습니다. 가. 전도운동은 1965년 민족복음화운동으로 시작되어 1984년 한국교회100주년기념대회와 군 선교까지 교파 간 연합과 일치를 통해 진행되었으며 한국교회 성장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나. 사회참여운동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반대운동으로 비롯되어 KSCF창설, NCCK의 민주화운동, 산업선교, 80년대 민주화운동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한계를 느낀 연합활동은 이후 WCC와의 관계 속에 통일운동을 지향하게 되고 88선언 이후 보수진영의 한기총 구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0. 1990년대 연합활동 90년대 들어서는 WCC의 JPIC서울대회와 1998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를 통한 ‘사람과 사람의 연합’을 통한 교회 갱신과 교회 일치 운동이 추진되었습니다. 이제 기독교의 무게 중심은 북미, 유럽지역에서 아시아로 옮겨지고 있고 이에 따라 WCC의 총회가 부산에서 개최되었으며 이를 통해 한국교회가 세계 교회를 위해 기여해야 할 과제가 각인되었습니다. 즉 중국교회 성장을 위한 노릇과 한반도 평화 통일 운동에 대한 기여, 한국적 기독교 전통이 세계 교회를 새롭게 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연합운동이며 상호협력과 일치운동입니다. 이 시간에는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를 시대별로 살펴봅니다. 1. 선교초기 성경번역을 위한 연합활동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역사는 선교초기 선교사들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상임성서위원회를 조직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함으로써 ‘성경은 하나’라는 아주중요한 한국교회 전통을 확립했고 이로부터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2. 공의회 구성을 통한 에큐메니칼 운동 이후 장로교회의 경우 3개국 4개교단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공의회를 조직했고 이후 1905년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공동으로 공의회를 조직해 하나의 개신교를 조직하고자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24년 오늘날 NCCK가 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설립을 통해 연합과 일치운동을 계속 펼쳐나갔습니다. 3. 문서 선교로 진행된 에큐메니칼 운동 또한 연합으로 잡지를 발간하고 각 교단별로 발간되던 신문도 합간하여 대한그리스도신문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하나의 찬송가를 발간하는 등 연합활동을 통한 문서선교 또한 활발하였습니다. 4. 병원과 학교운영을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 병원과 학교는 설립 당시부터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 설립되거나 혹은 각각 설립된 학교라고 해도 설립 주체와는 상관없이 공동으로 경영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선교초기부터 아름답게 자리 잡았으나 1959년 장로교분열과 함께 에큐메니칼 운동을 진보, 통일운동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어졌습니다. 5. 사회봉사활동으로 나타난 일제치하의 에큐메니칼 운동 가. 3.1운동 이후 교회의 연합사업은 실력양성운동으로 나타납니다. 즉 물산장려, 농촌경제살리기, 금주와 금연운동, 국산품 애용운동 등을 통해 사회에 대한 교회의 공공성을 세상 속에 각인시켰으며 이는 오늘날 교회의 게토화와는 대비되는 모습이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모습은 1차대전 이후 평화를 위한 봉사활동에서 비롯된 유럽의 에큐메니칼 운동과도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나. 일제강점기 기독교단체의 연합활동은 YMCA로 대표됩니다. YMCA는 을사늑약 후 국제교류의 창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 근대화의 매우 중요한 계몽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WCC를 둘러싸고 한국교회 안에서 60년째 이어지고 있는 논쟁과 오해에 대해 알아보고 있는데 이번 주는 세 번째 항목부터 살펴봅니다. 3. WCC의 선교유예론 이 논쟁은 WCC도 과연 선교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데, 19세기 유럽과 북미의 교회들은 아프리카 등지에서 선교에 나서면서 서로 협력하였고 이 선교를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10년 세계선교대회를 열고 1921년 국제선교협의회를 창설하였으며 1948년에 이르러 WCC를 창설하였습니다. 즉 WCC는 선교를 위해 선교현장에서 출발한 단체이므로 이런 논쟁에 이른 의혹은 불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혹의 출발은 1960년대에 본격화된 제국주의선교에 대한 논란과 이에 따라 1971년부터 지속된 선교유예 논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유예는 결의에 이르지 못했고 대안으로 동반자 관계로의 발전을 도모하게 되었습니다. 즉 식민정책에 수반된 제국주의 선교정책을 반성하고 토착문화를 고려하여 선교를 모색함으로써 선교하는 자와 대상자가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게 하려는 시도였습니다. 4. WCC에는 사회구원만 있다는 의혹 WCC안에는 진보와 보수가 함께 존재하며 수평적 사회구원과 수직적 영혼구원은 늘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WCC는 냉전시대에 하나님이 뜻대로 화해를 추구하기 위하여 힘썼으나 1968년 4차 총회에는 새로운 이슈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즉 서구의 학생운동과 미국의 케네디,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월남전 지속, 남미군사독재정권의 등장, 남아공의 인종차별 상황 등에 따라 사회구원이 강조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3년 방콕선교대회에서는 개인구원과 사회참여가 조화를 이루었고 복음주의자들도 사회참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면서 점차 양 진영이 접촉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양 진영 모두 영혼구원과 사회참여를 통전적인 관점으로 보는 수렴이 일어나고 있어 두 진영 모두를 한쪽에 치우친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5. WCC의 게릴라 지원설 WCC는 사회 불의와 부정을 선교의 과제로 이해하고 사회참여 적극적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1969년 ‘인종차별정책 반대 프로그램’을 설립하였고 그 활동 중 하나로 남아공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교회를 지원하였습니다. 이에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WCC의 게릴라 지원설을 기사로 수차례 게재하였으며 그 기사의 자료는 남아공백인정권으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한국 내에서 WCC가 용공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는 논거들은 주로 이 기사에 근거한 것입니다. 남아공백인정부는 ICCC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여 WCC를 비난하도록 하였고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을 옹호하도록 했습니다. 1994년 만델라가 집권하자 ICCC에 대한 남아공의 지원은 중단되었습니다. 6. WCC의 종교다원주의 논쟁 우리가 사는 사회는 다원화사회이지만 우리 신앙은 결코 다원화될 수 없습니다. WCC에 대한 종교다원주의 논쟁은 1961년 인도총회 이후 전개된 ‘종교간의 대화프로그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는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종교간 갈등과 정죄가 사회를 폭력과 분열로 몰아넣는 것을 보면서 마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4차 총회는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대화와 선포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하였고 5차 총회에서는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해야 하나 혼합주의 위험에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다만 1989년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가 ‘예수 외에 구원의 길이 없으나 하나님의 구원 능력에 제한을 둘 수 없다’는 내용의 문서를 채택하였고 7차 총회의 정교수 초혼제 사건, 1990년 바아르문서 등으로 인해 논쟁의 소지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WCC의 공식 입장이 아닐뿐더러 WCC의 공식입장은 보수적이고 정통적인 입장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으므로 WCC를 종교다원주의로 몰아갈 수는 없습니다. 유독 한국교회 안에서 WCC에 대한 논쟁이 이토록 지속되는 것은 한국의 교단중심적 이해를 가지고 WCC를 이해하려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제 WCC의 대화와 충분한 학문적 자유 그리고 모든 공식 입장은 중앙위원회와 총회를 통해 결정되는 구조를 이해해야만 한다. 정리하면 WCC는 헌장을 통해 예수 외에 구원이 없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다만 우리 사회는 다원화 사회로서 종교영역에 있어서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 존중의 태도를 갖는 것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WCC와 한국교회 2013년 WCC 제10차 부산총회가 유치된 2008년부터 총회가 끝난 지금까지 WCC를 둘러싼 한국교회의 분란과 논쟁과 매우 격렬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논쟁이라기보다는 1950년대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단 분열의 한 단초가 되었던 WCC를 둘러싼 논쟁의 재연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WCC와 한국교회의 만남은 1948년 WCC 1차 총회에 한국장로교회 대표가 참석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WCC 제1차 총회에 참석한 한국장로교회대표가 귀국 보고하고 이어서 정식 회원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1954년 제2차 총회 참석을 위해 대표 파송을 결정한 즈음 WCC의 단일교회 추진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제3의 분열을 염려하던 장로교회 총회는 위원회 연구활동을 통해 총회입장을 정리하였으나 의혹을 불식하지 못한 승동측이 WCC의 용공. 신신학. 단일교회 지향 의혹을 주장하며 WCC영구탈퇴와 에큐메니칼 운동 반대를 선포하였고 이것이 하나의 불씨가 되어 장로교단은 또 다시 합동과 통합측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에 교단 재 결합을 위하여 통합측이 WCC를 탈퇴하였으나 결국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교단 분열의 한 단초로까지 발전한 WCC관련 논쟁 가운데 단일교회지향에 대한 의혹은 WCC의 헌장에 명시된 것으로 밝히 해소될 수 있습니다. WCC 헌장은 ‘성경을 따라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요 구주이심을 고백하는 다양한 교회들의 교제, 코이노니아’라고 명시함으로써 WCC신학이 개혁교회의 성경중심 신학정체성에 대립된다는 의혹에 대해 명백한 입장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1951년 WCC는 교회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가 고백하는대로 ‘하나의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라고 규정하였으며, 또한 교회에 대한 칼빈의 언급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규정과 태도는 성경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표현되는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적 정체성과 위배된다고 볼 수 없습니다.…
70년대 이후 교회 여성 교회부흥과 사회발전에 기여한 여성 60년대 산업화와 함께 한국교회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대도시 교회가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한편 사회적 약자와 손잡은 일부 목회자들은 작은교회를 추구하였고 또 다른 제3의 목소리는 바로 여성들로서 물량적 성장에 치우친 대형교회를 향한 일침을 가하며 모성을 기반으로 한 생명사랑운동을 전개하여 한국교회와 사회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즉 남성과 투쟁하기보다 조화를 이룸으로써 남녀 모두가 자유하는 인격체로서 동등성을 확립하고자 하였으며 여성이 여성됨에 자긍심을 가지는 여성의식을 확산하기 위해 계속교육원을 설립하고 여전도회관을 설립하여 마침내 여성안수를 실현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오늘과 내일의 교회 여성 철기문명으로 대표되는 현대문명이 가져온 온갖 폐해는 생명이 결핍된 문명이라는 반성과 함께 미래에는 부드럽고 생명을 살리는 문명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여성적 리러십은 시대적 요청이라고 파악되었습니다. 한편 철학자 하이덱거는 남성적 진리체계에서 여성적 진리체계로 이동하는 것이야 말로 진리에 이르는 길이며 이는 인류의 시원에 여성 즉 어머니이기에 그렇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한편 모성적 생명력이 이끄는 여성리더십은 여전도회전국연합회를 40여년 동안 이끌어온 이연옥회장의 동행리더십을 통해 주창되고 실현되었습니다. 즉 생명 사랑의 부드러운 열정과 섬김을 통한 영향력, 변화를 이끌어내는 설득력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1930년대와 해방 이후 교회여성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장로교 안에서는 함남노회에서 청원되고 가결된 여성들의 치리권 청원이 1933년과 이듬해 거푸 부결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는 여성치리권 찬반 목회자의 기독신보 기고가 논쟁으로 발전하며 끝내 찬성론자의 주장 철회가 마감되면서 교회내 여성관련 질서가 봉건주의 질서로 회귀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보수회귀 성향과 보수성은 5년후 신사참배 결의로 무너졌고 끝내 한국교회의 소멸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때 교회 여성들은 상위기관인 총회 의결을 정면 거부하거나 침묵함으로서 소수의 남은 자가 되어 신앙 양심과 신앙의 순결을 지켜 후일 교회 재건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북한교회는 공산세력과의 투쟁으로 신사참배 결의를 참회할 기회를 놓쳤고 남한교회는 이 문제를 놓고 분열을 거듭하며 참다운 참회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전도회는 이와는 반대로 일치의 역사, 살리는 역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수면 아래 머물던 여전도회전국연합회를 재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역대 회장들의 수고와 공로가 매우 헌신적이었으며 그 결과 교회여성지도자 양성을 위한 서울여자대학교를 설립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 건국을 위한 입법위원 가운데 교회여성이 다수 참여하여 남녀평등에 입각한 입법 건의안을 발의하였고 195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궐기대회를 열어 사회 윤리와 남녀평등의 정신에 부합하는 후보의 지지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즉 1920년대 YWCA와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등을 통한 교회여성의 아름다운 유산은 1950년대 되살아 나 건국정신에 남녀평등의 정신이 반영되고 가부장적 가족질서를 타파하며 사회윤리를 정화하는 운동으로 승계되었고 교회 내적으로는 여전도회전국연합회를 재건하여 신사참배 이후 소멸된 한국교회를 재건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1920년대와 30년대 한국교회여성 한국교회 초창기에 복음으로 인한 변화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 중 하나는 우리나라 여성의 의식변화였습니다. 예수 안에서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라는 자긍심을 갖게 된 교회여성들은 1898년 평양 널다리골교회에서 여전도회를 조직했습니다. 여전도회는 전국 곳곳으로 조직이 파급되었고 이후 여전도회지방연합회를 거쳐 1928년 여전도회전국연합회가 장로교총회의 법적 기관으로 승인되었습니다. 여전도회를 축으로 한 교회여성의 교회 밖 활동은 교회여성들이 국가 주권의식을 갖추면서 성경 속 인물들을 따라 항일운동을 위한 의식으로 발전하여 항일결사단체 결성를 결성했고 독립자금을 마련하여 임시 정부에 보내는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이후 만세운동 참여,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창설, YWCA 창설과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근우회 창설 등으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한편 교회 안의 여성 활동은 전도부인의 활동으로 대표됩니다. 전도부인은 외국인 여성 선교사의 보조자로서 우리말 교사와 통역, 여성 전도를 목적으로 세워졌습니다. 특히 안방 깊이 갖혀있는 여성전도를 위해 사경회와 성경연구반, 성경훈련학교 등을 통해 성경과 위생, 산수 등 여성 생활향상 전반을 위한 과목을 이수하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전도 현장에서는 복음과 함께 한글 가르치기가 병행되었고 이어서 새신자 교육, 환자 심방, 어린이 주일학교 교육까지 이어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이 수행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의 구조와 의식, 제도의 한계로 인해 교회여성의 역할은 정체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가부장적 봉건시대로 회귀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1920년대와 30년에 걸친 교회 여성의 모습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여성안수실현2 1977년 여성안수실현을 위한 여전도회전국연횝회의 활동은 보다 구체적이었습니다. 신학대학원 교과과목에 여전도회를 포함시키고, 주일학교공과에 여성에 대한 의식 고취를 위한 과목을 삽입했으며, 미 장로교회 여성지도자를 초청해 경험을 듣는 강연회를 여는 등 보다 효과적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1990년 여전도회전국연합회는 전국노회장을 초청해 협조를 요청하고 신학대교수들을 통해 여성안수의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는데 주력했는데 이들은 교회 안팎에서 남녀는 수평적 관계와 파트너쉽을 가져야 하며, 교인의 다수인 여성이 당회에서 배제되는 것은 교회내 민주화에 역행할 뿐 아니라 비성격적이며 비사회적이고 주장했습니다. 마참내 1994년 79차 총회에서 토론없이 표결한 결과 여성안수가 의결되었고 이어서 각 노회에서도 통과되어 한국교회의 여성안수는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성안수가 법제화는 되었으나 문화적 측면에서는 여전히 인습과 전통적 교회문화에 얽매여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는 점은 여전히 안고 있는 한국교회의 과제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와 여성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의 여성에 대한 인식과 위상이 어떠한지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19세기 후반 여성은 봉건적 인습에 묶여 집안에 갇혀 지냄으로써 지적, 학문적 활동에서는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894년 갑오개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는 가부장적 사회제도와 관습에 대한 변화를 추구함으로써 사람을 하나의 개체로 인식하고 특히 여성에 대한 인권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때 선교사들의 입국은 이러한 인식에 활성화를 기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설립한 교회에 여성들이 출석하게 되면서 여성은 공간적으로 집 밖으로 해방되어 나오게 되었고,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을 깨우치면서 문맹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또한 기독교는 여성교육기관 설립을 통해 강하고 능력있는 한국여성을 성장시키는 노릇을 충실히 감당했습니다. 부산의 일신여학교와 서울의 정신여학교 등이 대표적이었습니다. 당시 신문기사는 여성에게 있어서 기독교란 구습을 벗는 것이며 예수의 행적으로 배워 여성이 여성의 자리에 머무르면서 여성됨에 자긍심을 갖는 것 즉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2000년대 교회의 평화통일 운동과 북한선교 북한체제 붕괴가 가시화되었다고 생각한 한국교회가 90년대 북한교회 재건운동에 나선 이후에도 북한 체제가 유지되지 한국교회의 북한선교 방향은 탈북자 선교를 통한 영적 성전 건축사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90년대 남한교회의 북한에 대한 시선은 낙관론과 신중론 두 가지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장 통합교단은 교류와 소통을 추구하는 획기적 북한선교 정책을 추진해 나갑니다. 그 결과로 97년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접촉하여 밀가루를 지원하였고, 관련노회 즉 평양노회 차원에서 온실공급과 환자지원 사업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이후 과거 존재했던 신학교 재건을 지원하고 평양제일교회를 건축함으로써 북한교회 재건의 꿈을 실현하게 되엇습니다. 이후에도 통합총회는 통일에 대한 선교정책을 정리하여 북한선교와 통일 두 가지를 동시에 추진하여 평화선언을 발표하고 2005년에는 광복60주년을 맞아 남북교회지도자가 금강산에서 회동하는 등의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여성안수실현 1990년대 한국교회의 커다란 사건중 하나는 1994년에 이루어진 여성에 대한 치리권과 목사안수 실현이었습니다. 이는 1933년 함남노회에서 여성노회원의 청원과 노회의 허락, 총회의 부결이 있은지 만61년만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여성안수를 놓고 교계에서 논쟁이 벌어지기까지 하였으나 이후 한국교회가 식물교회로 전락하여 논의가 중단되었다가 1945년 광복 후에 여성안수 논의는 부활했습니다. 이에 따라 여성무마차원에서 권사직이 신설되어 항존직으로 변경되었으나 여성안수에 대한 청원과 추진은 70년대 들어 여전도회전국연합회에 의해 적극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71년에는 총회에 정식 안건으로 채택되었고 이후 계속 부결되기는 했으나 1978년 총회에서는 불과 11표차로 부결되는 등 총회통과가 점차 현실로 다가오는 가운데 여전도회전국연합회는 자체논의를 본격화하고 설문조사를 하는 등 보다 적극적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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